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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Mar 20. 2024

시네필 문화에서 영화의 지위


시네필 문화는 젊은이들의 전유물일까? 혹은, 시네필 문화는 남초문화일까? 워낙 다양한 접근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이러한 가정에서 생각해보고 싶은 건 ‘바깥’이다. 이런 이야기를 자기들 스스로 말하는 것만큼 낯간지러운 일이 없을 테니 말이다. 가령 멘사 회원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멘사 회원들 사이에서 나오는 “우리는 왜 멘사가 되었나”라는 말이 외부에서 어떻게 보일지는 자명하다. 마찬가지로 시네필들 사이에서 시네필에 대해 묻는 일은 어딘지 모르게 낯간지럽다. 이는 시네필이라는 단어가 일종의 문화적 구분 짓기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간다는 걸 여실히 드러내서이기도 하다. 가령 오디오필은 음악을 더 선명하고 들으려 하는데,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고가의 장비나 공간을 대여하기도 한다. 영화로 치면 이는 영화를 더 깊고 섬세하게 감상하고 싶은 셈이다. 우리가 시네필에 대해 갖는 의구심 중 하나는 바로 그러한 투과 능력에 대한 오용으로, 세계의 층위를 구분 짓는 방식에 관한다. 시네필은 자기들을 무언가를 볼 수 있는 자들로 ‘구분 짓기’보다, 세계를 딥포커싱해서 세계를 구축하는 방식들에 간섭하려 든다. 이들은 사물을 직접 바꾸기보다는 그러한 사물들 간의 연결부위에서 새로운 운동성과 형상성을 찾아내려 한다. 바로 이런 점이 시네필 문화가 비교적 젊다고 느껴지게끔 했을 것이다. 젊은이들은 아직 세계가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다고 믿으니 말이다. 마치 젊은이들의 뇌가 신경가소성을 유연하게 가져가듯, 시네필들은 영화가 아직 ‘세계’로서 굳어지지 않은 상태여서 그 안에 침투하면서 여행을 다니거나 변혁을 일으킬만한 정도의 기회가 남아있다고 보았을 수 있다. 말하자면 시네필은 세계로 전진하기 위해 마련된 예비소집 장소로 영화를 선택했을 수 있다. 세계를 바꿀 수 있다고 믿어서 젊은이인 게 아니라, 그런 세계를 위해 자신을 바꿀 수 있기에 이들은 자기를 시네필로서 자칭했다. 


시네필이 가소성을 토대로 한 존재라고 가정할 때 해볼 수 있는 흥미로운 생각 하나가 있다. 어쩌면 시네필은 세계의 ‘가속’ 아래 생겨난 게 아니냐는 점이다. 세계를 바꿀 수 없다는 믿음이 이를 대신해 자신을 변하게 했다는 가정에서 누락된 건 ‘바깥’에 대한 묘사이다. 이들 ‘바깥’은 너무 굳어졌기에 일말의 변화도 이루어질 수 없는 곳이기보다 너무 빠르게 가속해서 외부의 침입을 허용할 수 없는 상태일 수도 있어 보인다. 가소성이 세계와의 연결회로를 능동적으로 바꿀 수 있다고 믿어지는 자기에 관한 능력이라면, 이때 ‘바깥’은 그러한 능동성을 위해 마련된 무대가 되어야만 한다. 그러니까, ‘바깥’은 너무 빠르게 변화하기에 그들 사이에 침투할 수 없는 상태인 것이지 너무 단단해서 이를 파고들 여지가 없는 곳은 아닌 셈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시네필들에게서 ‘자기’를 바꾼다는 가정이 떠오르게 된 계기를 추론하는 일은 어느 정도 가능하다. 세계가 빠르게 바뀌는 상황에서, 그런 세계를 바꾸는 방식은 내부와 외부를 전도하는 일은 아니었을까. 오히려 ‘자기’가 빠르게 바뀌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바깥’이 느리게끔 보이게 하는 일이었던 게 아닐까. 세상을 더 선명하게 볼 수 있다는 건 세계의 일면을 볼 수 있다는 뜻이며 그러한 발견을 갖고서 무엇을 작업할지는 전적으로 개인의 선택에 달렸다. 음악이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 조화의 능력이라면, 연극이 우리에게 알려준 것이 빙의의 능력이라면, 문학이 우리에게 드러낸 것이 세계의 분기점이라면, 영화가 우리에게 드러낸 것은 세계의 층위다. 세계는 항상 분열되어있지만, 여기서 분열은 서로 상충하는 것들의 비가역적인 분기를 뜻하는 게 아니라 여러 모순되는 요인들의 비정상적인 결합구조를 암시한다. 영화를 혼성예술로 지칭하는 몇몇 시선들에서 우리는 꿈의 세계를 묘사하는 일이 아니라 그런 세계를 가로지르는 횡단과 조합, 형상을 구성하는 주체의 능력을 더 생각해보게 된다. 


시네필이 자기를 바꾸노라 선언하는 일은 횡단과 관통의 능력을 스스로에 부여한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세계가 점점 액체로 변해가는 과정에서 대두하는 게 액화의 재앙이라면, 여기서 횡단과 관통은 그런 세계에 녹아들기보다 줄곧 자기일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네필은 세계가 불안정해질수록 점점 더 시대를 초과하는 능력을 갖는다. 세계가 손쓸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바뀐다면, 그에 대항하는 방법은 그것보다 더 빠르게 변해서 적응해버리는 것이다. 이미 바깥이 액체가 되어버린 상황에서는 어떠한 외부에 대항하는 일이 불가하지만, 그러한 연결 부위를 가로지르는 일에서만큼은 개인에게서 액화의 장점이 있다. 이는 무엇이든 될 수 있노라고 자신을 믿는 게 아니라 아직 본격적으로 미래를 확정 짓지 않은 젊은이들만이 취할 수 있는 자세다. 외부와 내부를 전도하면, 오히려 빠른 흐름의 외부야말로 밀도차로 인한 내부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내부를 결속하는 효과가 있다. 그리고 이는 미래를 특정할 수 없다는 젊은이들에게 미래는 대안이 없는 게 아니라 오히려 대안이 없는 존재로서의 자신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변하지 않는 것을 만들어내는 힘이 있다. 여기서 ‘최후’는 ‘막장’을 뜻하지 않으며, ‘궁지에 몰림’은 ‘끝내기’를 가리키지 않는다. 오히려 밀도 차로 인해 가라앉은 내부는 가장 무거운 것이라는 점에서 세계의 중핵으로서의 자아를 도출한다. 이 경우 시네필 문화에서 ‘젊음’은 이러한 문화를 실질적으로 구성하는 인구 층을 가리키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서 인간의 ‘유아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확장될 가능성이 있다. 아감벤은 유아기를 두고서 “언어 이전의 경험”이자 “신체화되지 않는 것”으로 묘사하는데, 이를 따르자면 유아기는 분명 역사로서 잠재하지만 언어화되지 않는 경험이므로 잠재태로 볼 수는 없다. 유아기란 그저 끊임없이 자기로 돌아가게 해주는 형상일 뿐, “자아의 형태 아래서 (…) 존재는 무한히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시작된다’는 말의 아이러니함은 영화가 항상 ‘끝난다’라는 도래의 신호를 갖고서 작업한다는 점에 있다. 이는 비단 영화를 두고서 전쟁사와 연결했던 시기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 미키마우스의 유동성 등에서 생각을 재고해볼 여지가 있는 것 같다. 증기기관차와 미키 마우스의 관계는 어떠한 사이를 연결하는 신경망이 되어주었다는 점에서 유사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들 영화가 항상 전쟁에 관한 긍정적인 소식만을 선전했다는 점에서도 유사하다. 영화가 정부의 선전소식과 함께 시작되는 일은 미키마우스의 만화적인 움직임에서 신체변형의 공포나 통증 등을 발견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나는 웃음가스와도 같았던 것이다. 가령 서아프리카의 설화는 표정 짓기의 행위가 표면을 어떠한 상태로서 고정하고자 하는 의도임을 잘 보여준다. “조이보이는 절망이 떨어져 나갈 때까지 춤추고 노래한다”라는 대목은 미키마우스의 우스꽝스러운 몸짓이 ‘언어 이전의 경험’이면서 ‘시작되는 것’으로 이해될 가능성을 제기한다. 미키마우스의 신체는 의미적으로 하나의 형상을 이루기만 할 뿐이므로 죽거나 다치지 않으며, 무언가를 전달하기에 앞서 웃음을 전달한다는 점에서 언어에 포섭되지 않는다. 벤야민이 장난감에서 “이제는 더는 아닌” 것으로서 현전하는 일을 발견했듯, 어쩌면 시네필에게 영화란 자기를 부정하지 않고 파괴하지도 않으며 분열되지도 않으면서 있는 그대로 내버려둘 수 있을 하나의 보존 수단이었을 수도 있다. 이 과정에서 자신을 내버려두는 일은, 어른과 유아기의 관점에서 모든 아이는 죽거나 어른이 되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는 관점을 따라 사태나 사건에 대한 관점을 ‘어떻게’ 끝낼 것인지로만 바라보게 한다. 말하자면 시네필 문화에서 영화의 지위는 항상 무언가를 끝낸다는 점에서, 혹은 마주해야만 한다는 점에서 모든 언어화에 저항하는 일의 종착지였을지도 모른다. 


영화가 현실을 넘어설 수 없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이미 주어진 것을 풀어놓거나, 외부에서 바라보아지는 모습에 관해 기술하는 건 거울 없이 자신의 얼굴을 설명하는 것과도 같다. 어떠한 속살이 아니라 껍질에 관해 이야기하는 건, 자기객관화가 아무리 잘 된 사람이라도 쉽게 수행할 수 있을 과제가 아니다. 우리의 얼굴이 항상 세계와 마주한다는 점에서 표면이라면, 영화와 우리가 어떤 형태로 닿아있는지를 기술하는 일은 정말 어렵고 또한 이러한 전위성을 무기라던가 하는 형태로 적극 행사할 수 있을 이는 많지 않다. 가령 국가 간의 경계에 전진 배치된 군대는 전쟁이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을 암시하지만, 반대로 일시적으로 평화가 유지됨이 공공연하게 반포된 상황이므로 이때의 시간은 거진 찰나가 되기 마련이다. 선제타격 또한 모두가 아는 사실을 공공연하게 드러내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언어화의 이전에 자리한다. 즉, 초과하지 않는다는 건 항상 유아기에 머무르는 일과도 같다. 이러한 찰나가 바로 미래가 지평선 너머에 놓인 상황에서 이를 건너야만 하는 난민의 상태를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영화는 늘 다가오는 것들에 대해 말하고, 마주하고 있는 것들에 관해 말한다. 이러한 능력은 아직 체계에 포섭되지 않은 젊은 층이 더 잘 발휘할 수 있으므로 시네필 문화는 비교적 젊다고 여겨진다. 이들에게 영화는 언어로 결집하지 않는 자기에 관한 기술을 두고서 내부와 외부를 역전할 수 있는 단말마가 되어주었을 것이다. 이는 비교적 유동적인 환경에 놓여있어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믿어지는 젊은이들의 문화가 사실은 ‘무엇도 확정되지 않은’ 상황일 뿐이라는 점을 가리키는 상황에서, 시네필 문화의 일면이 사실은 허락된 여유일 뿐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이를 토대로 정리해보았을 때 시네필이란, ‘바깥’을 내부로 전도함에 따라 자기를 바꾸는 일이 곧 세계를 포섭하는 일이라고 여기는 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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