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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Mar 26. 2024

무대를 등지는 사람


“누군가 무언가를 ‘던지는’ 것의 주체가 되면 그 계급, 성별, 나이, 피부색 등등에 관계없이 그 동작이 이야기를 새로운 상황으로 변질시키게 될 것이다. 그런 역할을 띠게 되는 동작으로서의 ‘던지는’ 것을, ‘주제'라고 부르기로 하자. 모든 작품에 이야기의 차이를 넘어 반복되는 이 필름적 현실 (…) 작품의 장르와도 일체 무관하게, 뜻깊은 순간에 반복됨으로써 서사론적 지속을 시동하게 하거나, 가속시키거나, 심지어 정지시키는 작용을 한다 (…)”.  


존 포드에 관해 쓴 <존 포드론>에서, 하스미 시게히코는 ‘던진다’라는 행위를 말한다. 여기서 그는 이야기의 새로운 국면을 여는 것으로써 ‘던진다’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부연되는 설명을 따르면 이는 ‘주제’로 지칭된다는 점에서 일종의 ‘화두’인 듯 보인다. “이야기의 차이를 넘어 반복되는 필름적 현실”. 화두는 언어에 앞선다는 점에서 ‘선험적’이며 이를 따르자면 언어화의 이전에 자리 잡는 것, ‘본다는 것’에 대한 관찰자의 지위를 강조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던진다’라는 건 우리가 그동안 영화에 해왔던 질문들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영화를 보며 현실과의 구분점을 물색하는 일보다 중요한 건, 우리가 그런 구분점들을 사로잡는 하나의 방식이었다. 영화와 현실 간의 차이를 지적하는 일에서 중요한 건 그런 차이들에 다가서고자 사로잡는 구분점들이었던 것이다. 이른바 부여잡는다는 것은, 아감벤의 표현을 빌려 “순수한 언어에서 담화로 이행하는 ‘인간적인 것’의 순간”을 사로잡는 일이었다. 말하자면 인간의 역사란 언어화의 이전에 자리하지 않으므로, 하스미는 존 포드의 영화를 두고서 ‘던진다’라는 표현을 사용했던 셈이다. 서부 개척시대를 따라 미국의 역사를 기술하는 과정에서는 ‘던진다’라는 것이 일종의 기원이 되어, 포드 영화에서 주제란 그 돌출과 함께 영화를 표면으로 드러낸다고 보아도 좋다. 기원전을 두고서 ‘기록되지 않은 역사’라고 부르듯이, 아직 언어로 정제되지 않은 이미지에 관해 우리는 ‘필름’이라 불렀다. 


존 포드의 영화가 다룬 초기 미국의 역사가 필름적 현실로 이해되는 것엔 그런 이유가 있다. 존 포드가 다루는 ‘날 것’의 역사는 기본적으로 필름의 성질과 닮아있어서, 이글거리는 태양은 필름 입자의 질료에, 흑백의 무대는 이분법의 논리로 변환된다. 언어의 논리가 손을 뻗지 못하는 곳엔 항상 보안관이 있고, 카메라가 닿지 않는 곳엔 항상 황무지가 있다. 이때 화면 위에 등장해 다시금 화면 밖으로 퇴장해가는 존 웨인의 모습은 ‘자기’를 정립하기 이전의 존재들로서 관객을 호명한다. 이 필름적 현실에서 관객의 자리는 언어의 자리이자 동시에 인간의 자리였던 셈이다. 이를 따라 ‘현실’은 항상 기원으로만 남는다. 모든 언어에 저항하는 것은 오직 자기밖에 없으므로, 필름적 현실은 아직 자기를 정립하기 ‘이전’을 다룬다는 점에서 관객이 항상 기원으로 남게끔 해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던진다’라는 말은 ‘끝낸다’라는 말과도 같았다. 환상에 사로잡히기보다 그걸 깨부수기를 택하는 일, 영화에 소속될 수 없다는 건 관객이 된다는 것이다-관객은 영화의 ‘기원’을 끝내고서 이를 ‘전’으로 구분 지었다. 영화가 끝남과 동시에 바깥에 풀려난 관객에게 영화는 시작과 끝이 말끔히 봉합된 장소와도 같아서, 이곳에는 그 모든 상처나 기쁨도 모두 버려지며 그 누구도 이를 밖으로 갖고 나올 수는 없었다. ‘던진다’라는 말은 표면을 통과하지 못한 감정들에 대한, 현실에 대한 한 가지 설명 방식에 가까웠고 이곳의 인간은 대지에 바로 서는 ‘석양의 무법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우치다 다쓰루는 ‘실존’이라는 말을 두고서 ‘바깥에 선다’라고 표현한다. 스크린의 표면이 언어화의 순간을 가리킨다면, 이들 관객으로서는 일종의 유아기를 탐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의견을 따라가면 관객을 등지고서 화면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무법자의 모습은 적어도 우리에게 다음 두 가지 사실을 말해준다. 이곳이 영화의 ‘바깥’에 속한다는 점과 무법자는 결국 ‘바깥’에 섬으로써만 실존한다는 점이다.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영화를 보며 자기를 떠올리는 일은 되려 자기가 되고 싶은 모습이기보다 자신이 끊어내야 할 면모에 가깝다. 정확하게는 영화는 포섭되지 않는 자기를 호명함으로써 육체의 이미지를 스크린에서 탈구시키고, 이를 따라 주체는 화면에 전적으로 자기를 투사하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붙잡으려’ 노력한다. 즉 현실에서의 작용과 반작용이 서로 반대를 향하듯이 영화와 현실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흐르며 이때 ‘던진다’라는 말은 사실상 ‘붙잡는다’라는 것과 동일하다. 그렇다면 필름적 현실이라는 표현은 아무쪼록 현실적 필름이기도 한바, 이들 영화는 우리로 하여금 현실에 ‘선다’라는 감각을 선사함으로써 진정으로 삶을 살아갈 용기를 주는 것은 아닐까. 보안관에 의해 구해진 건 다름 아닌 영화의 ‘바깥’으로서 오히려 이들 내부야말로 서서히 침몰하게 되는 건 아닐까. 만약 ‘언어’가 한 사람의 인간이 되었음을 가리킨다면 여기서 ‘인간’은 자기만의 주제를 갖고서 작업하는 인물일 것이다.


누구든지 영화를 보고 나면 영화를 경험했다는 점에서 당사자가 될 수밖에 없다. 이 이야기의 아이러니한 점은 영화를 두고서 삶으로 비유할 때는 정작 인생의 당사자가 되지 말아야 비로소 그게 가능하다는 점이다. 이른바 관객이 된다는 건 관찰자가 된다는 것과도 같으며, 영화를 ‘본다’는 의식은 이러한 전환의 과정에서 등장해온다. 생각해보면 영화에서 항상 인상에 남는 건 떠나는 순간이었다. 존 웨인이 문을 열고 나오는 가운데 카메라가 뒷걸음질치는 장면은 오즈 영화에서 자식의 새 출발을 떠오르게 한다. 자식이 떠나는 가운데, 부모는 삶의 한 분기점에 도착한다. 이는 마치 열차가 도착하던 순간에 놀라 극장을 나서던 초기 영화사의 한 면모와 마찬가지로 열차의 도착과 함께 극장을 나선 관객들을 연상케 하는데, 이는 극장이라는 공간이 이미지로 가득 차서 관객이 도망쳐나오는 일, 그러니까 필름적 현실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 여기에 소속될 수 없는 것은 ‘관객’임을 암시한다. “충격경험은 경험 안에 공백 지점이 있음을 함축한다”고 보는 입장에서는 ‘던진다’라는 말이 작용하는 쪽이 관객이라는 점이 자명하다고 볼 수 있다. 즉, 영화를 본다고 자각하는 일은 아이러니하게도 영화를 떠나는 순간에야 이루어지는 셈이다. 관객은 영화가 선사하는 경험들 안에서 목격한 공백을 자신의 것으로 사로잡기보다 사건을 끝내는 순간 삼는다. 무법자가 석양을 등진 채 황무지로 걸어가듯, 여기서 ‘공백’은 실패의 동의어가 아니다.


이 대목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따라 ‘던진다’라는 표현은 다음의 두 가지로 풀이될 수 있다. 우선 첫 번째는 ‘탈출’이다. 가속하거나 정지시키는 작용을 하는 이 ‘던진다’는 아무쪼록 영화가 새로운 순간으로 진입하도록 하며, 그런 점에서는 익숙히 알던 개념인 ‘찌른다’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무언가 말로 설명할 수 없다기보다는 우리가 ‘본다’는 것에 따라 이를 정보로 환산할 때, 이를 언어로 도출하는 과정에 앞선다는 점에서 일종의 반사막처럼 보이기도 한다-어떠한 주제로 지목된 자만이 비로소 관객이 된다는 점 말이다. 관객이 된다는 건 ‘자기’가 된다는 것이고 ‘자기’란 누구도 아닌 자신의 입장에 선다는 점을 뜻한다. 말하자면 이는 자신을 언어로 정제해낼 수 있을 존재들이 바로 관객이라는 점을 뜻한다. 따라서 ‘던진다’라던가 ‘사로잡는다’라는 것은 아무쪼록 자신에 대한 구속능력을 의미하며 이는 어딘가에 ‘가두어진다’라는 밀폐의 성격이 영화에서 왜 금기인지를 말해주는 것만 같다. 던지거나 사로잡는 일은 주체에 의해서만 행해지는 것일 뿐 어떠한 주제에 의해 수행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영화가 관객을 사로잡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영화에서 자신의 자리를 잃어버리고야 마는 것이다. 어른이 된 관객은 이제 더는 유년기를 보낼 수 없다는 점을 다름 아닌 육체의 응시를 통해 가장 처음으로 인식한다. 경험이 감각을 앞설 때를 두고서 우리는 삶이 자신을 초과한다고, 한 사람의 인간으로 ‘선다’고 말한다. 


돌출된 것들에서 영화에 질문을 던지는 행위가 영화에 대한 이해를 달리하게 해준다는 건 우리가 영화 비평에서 늘 찾아왔던 해답이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영화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해줄 무언가가 된다는 점에서 전회의 지점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삶이 전쟁터가 될 때 잠시나마 평화를 얻을 수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영화의 기능은 ‘던진다’라는 말에서 ‘미끄러진다’라는 운동성을 발견하는 것에 있다. 한 사람이 영화에 질문을 던질 때 ‘선다’라는 행위가 어떠한 상황 안에서 신체를 하나의 장소로 응용한다면, ‘던진다’는 우리가 영화를 바라보면서 상황을 인지하는 일이 자기를 새로운 국면으로 데려다 놓는 것에 가깝다. 그러니까 ‘선다’가 갑작스러운 ‘깨어남’과 연결된다면 ‘던진다’는 달리는 과정 등에서 공기의 저항을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떠한 사태나 사건에 맞서 싸운다. 삶이 무색할 정도로 빠르게 달린다는 것은, 비단 말을 타고 달리는 것만이 아니라 그저 어딘가로 나아가면서 자신을 스크린에 던질 뿐인 일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이를 주저앉는다고도 보지만, 무대를 등지는 것이 꼭 승리자의 입장에만 속한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어쩔 수 없이 떠나야만 하고 관객의 기본 속성이 그렇다. 본다는 것 이전에 ‘던진다’는 것이 있다.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저 공간 일부가 될 뿐이지만 시선을 던지고, 물음을 던지는 사람은 어느 곳에서도 항상 혼자가 된다. 그렇기에 영화 비평은 항상 자기 측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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