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차미 Apr 05. 2024

있을 곳이 없다: 감금수단으로서의 영화 관람


프리랜서는 역량에 따라 수입이 결정되는 직업이다. 그런 점에서는 작가로서 아무런 역량도 없는 게 아닌지 자문하게 된다. 그러니까 직업인으로서 글을 쓰고 있는지를 자문하면, 아닌 것 같다. 지속가능성을 평가해야 하는 자리에서는,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잘 알기에 스스로를 백수라고 소개하곤 한다. 하여튼 간에 최근 생각해보게 된 건 자아를 유지하는 일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인데 가령 ‘자아’라는 말이 그렇다. 사전적인 정의를 따르면 ‘자아’는 ‘자신에 대한 앎’이라서 “어디까지가 나 자신인지를 구분 짓는 능력”이다. 이 능력은 세계에서 나 자신을 분리해내는 일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세계를 자신의 ‘바깥’으로 밀어내는 것이기도 하므로 엄밀히 말하자면 ‘결벽’이라는 단어와도 무관하지 않다. ‘나 자신’을 아는 일은 자신을 고립시키는 일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마음의 벽을 건설해야만 하는 것이다. 결국 어느 쪽이든 간에, 자아란 세계의 ‘바깥’이라는 점에서 결벽 증세라고도 볼 수 있다. 자신이기를 위해 세상을 등질 수도 있지만, 반대로 세상을 살아가려면 자기를 등져야 하는 때도 일도 있다. 누군가는 그 모든 일이 결국 자신의 선택임을 강조하지만 이런 것들은 개인의 선택을 초과해있다. 


그러니 이런 선택을 앞둔 개인이 방어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자신이기를 원할수록 사람들은 점점 더 외롭고, 고독해진다. 타인과 뚜렷하게 구분되는 지점은 그 사람을 특정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고유명으로 동작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세계에 섞여들지 못하게끔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결국 사람들은 자신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세상을 포기하거나 이 둘 사이에서 선택의 기로에 선다. 양쪽 모두를 거머쥘 수는 없고, 어른이 된다는 건 자신이 모두를 구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닫는 일이다. 사람들은 자기를 구하던가 아니면 세계를 구하던가 둘 중 하나만을 택해야 할 때 비로소 어른이 된다. 어른이 되려면 자기만의 세계를 벗어나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가도, 결과적으로는 자기 삶에서 자신이 주가 되지 않는다면 그런 삶은 또 문제가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런 점에서 유년기는 누구나 갖고 있고 또 ‘어른’이 된 자신과 확연히 구분된다는 점에서 자아를 이루는 주된 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게 특유의 폐쇄성으로 인해 외부와의 교류를 방해하는 것이든, 아니면 ‘낯선’ 느낌을 주어서 밖의 사람들에게 다소 이색적인 느낌을 줄 것인지는 또 다른 문제다. 


이런 관점의 연장에서 작가이기보다는 관객으로서의 자신을 더 생각해보게 된다. 일반적으로는 작가야말로 자기만의 관점으로 세계를 바라본다고 생각하겠지만, ‘작가’는 상대방을 설득하는 위치이지 어떠한 삶에 대한 수행적 지위는 아니다. 오히려 관객이야말로 자신이 있는 그대로 보는 것들에 대해 진솔히 서술하는 행위자이다. 관객은 세계를 바꾸려 하기보다 어떠한 위치에 ‘서는 일’을 통해 다른 세계를 목격한다. 관객은 유년기에 머무르며 밖으로 나서기를 망설이는 관찰자이고 그렇기에 어른이 되면 자신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즉, 관객은 세계를 창조하기보다 그러한 세계를 여행한다. 이를테면 에세이와 같은 문학의 장르를 떠올려보자. 에세이의 시초로 알려진 몽테뉴는 ‘시험해본다 essayer’는 단어에서 에세이essai를 창조해냈다. 작가에게 세계가 자신의 의지를 실험하면서 관철해가는 곳이라면, 그에게는 자신의 신체 또한 변형 가능한 범주에 속한다. 반면 관객에게 세계는 독자적으로 의지를 갖고 행동하므로 그러한 의지를 두고서 대결하는 관계에 있다. 즉 작가의 세계가 자연이라면 관객의 세계는 무대이다. 작가는 세계를 개척하고 관객은 항상 무대의 이후를 생각한다. 


관객은 세계를 바꾸려 하지 않으며, 그저 자신의 신체를 갖고서만 이들 세계에 존속할 뿐이다. 바로 이러한 신체에의 결집이 우리가 항상성이라 부르는 자기 개성이다. 무대는 특별한 누군가를 양산하는 게 아니라 보편적인 것들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세계의 변혁 없이 구조를 드러내는 효과가 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어떠한 조건에서도 인간의 속성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할 때, 작가는 그러한 조건을 자신이 처한 신체에서 찾는 반면 관객은 어떠한 환경에서 자기로 돌아가려는 속성이 바로 인간의 조건이라고 말한다.  이른바 ‘관객’의 주된 능력은 상상할 수 있다면 그 어떤 일이든 실현해 보인다는 점, 작가가 자신이 살아갈 세상을 위해 투쟁한다면, 관객은 투쟁하는 세상에서 살아갈 자신을 바라본다. 무엇보다 그런 상상의 중심에는 자신이 있으므로 ‘상상’은 ‘생존’을 내포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관객’은 세계와 함께 침몰하기보다 그러한 침몰 이후를 ‘상상’하는 것에서 자신의 능력을 찾는다. 왜냐하면 관객은 자신이 자신이 살아갈 세상이 아니라 살아가는 자신을 구성하는 일에 모든 연상을 투자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구성하는 일은 무언가 ‘된다’는 점에서 바깥을 향하는 미래 구상의 한 면모처럼 보이지만, 무엇이 죽음으로 향하는지를 자문한다는 점에서 절대적인 내부를 구상하는 것이기도 하다. 미래가 열려있다면 유년기는 우리가 출발해왔다는 점에서 죽음과 동일한 역할, ‘구성점’으로 기능한다. 그렇기에 관객에게 파국은 하나의 실질적인 강령이기보다 이미 상상된 것을 가리킨다. 관객이 타인의 입장에서 서서 그를 변화시키지 않는 것은 자신이 그를 바라보는 방식에서 단지 세상과의 출입구로만 여기기 때문이다. ‘관객’으로서 느끼는 무기력함은 아마도 그런 점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살아갈 세상을 물려주려 하기보다는 그런 세계를 살아가고 있을 뿐이라면서 뒤늦게 어떠한 처지에 서는 일은 마치 영화를 통해 세계를 여행할 수 있다고 믿는 몇몇 시네필의 마음가짐과도 같다. 예를 들어 <노 베어스>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같은 영화를 보면, 어떠한 상황에서 창문은 무언가를 들여다보는 것만큼이나 장소를 특정하는 일에 능숙하다는 걸 알게 된다. 창문은 어딘가를 들여다보는 창구가 된다는 점에서, 그 의미와는 관계없이 항상 ‘내부’를 갖고 있으며 이는 심지어 실질적인 구획을 갖지 않는 경우에도 그렇다. 


‘창문’을 들여다보는 행위는 우리가 실제로 창문 내부의 공간으로 가지 못하더라도 그곳에 무언가 있다는 사실을 주지하는 효과가 있다. 우리가 공간에 대해 아는 일은 정확히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 자신을 밀려나게 한다. ‘창문’은 우리가 무언가를 들여다봄으로써 우리 자신이 거기에 없다는 점을 주지시킨다. 요약하면 우리가 어딘가를 볼 때, 우리 자신은 그곳에 없다. 바로 이것이 과거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영화라는 매체를 관통하는 불변의 법칙이다. 영화가 항상 ‘장소’를 동반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우리 자신이 거기를 들여다보는 탓이라는 점 말이다. 작가는 계속해서 무대의 다음 장으로 이동하지만 ‘관객’은 자신이 머무를 장소를 요구하고, 이는 대개 자신의 유년기가 되는 일이 잦아서 ‘어른’은 영화에 들어서지 못하는 ‘바깥’의 자신으로 구분되곤 한다. 따라서 오늘날 “영화는 어디에 있는가”라거나 “영화의 장소는 어디인가”라는 물음은 엄밀히 말해 이러한 ‘서기’의 수행성에 대한 논의로도 보인다. 시네필들은 이를 수행하기 위해 ‘창문’을 요구하는데, 그들은 영화는 어떤 형태로든 자신을 현실에서 분리해야 하며, 이를 따라 ‘스크린’은 개념적으로 존속해야 한다고 믿는다. 


오늘날 스크린이라는 단어는 영사기의 빛이 안착하는 표면이 아니라 우리가 뚫고 들어갈 수 없는 곳을 지정한다. 마치 해리포터에 나오는 승강장처럼, 단순한 상상만으로는 관객의 신체가 절단되어버릴 우려가 있으므로 ‘스크린’은 관객이 영화의 장소에 성공적으로 안착하기 위한 방안이다. 즉, 허가되지 않은 상상은 물질을 투과하는 과정에서 오착으로 인해 신체를 절단해버릴 우려가 있는데 이를 따르자면 ‘스크린’이 어느 정도 관음의 성격을 갖는 것은 그것이 ‘허가된 상상’이기 때문이다. 스크린은 일방적으로 화면 너머를 응시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관음적이지만 여기서는 관찰자의 지위가 유지되는 일이 더 중요하다. 스크린은 ‘엿보기’의 감각이기 전에 ‘안전함’을 확보한다. 적어도 환상을 뚫고 가는 작업에서 영화는 신체를 보전하고, 이를 따라 ‘영화의 장소’는 한편으로는 대피소처럼 여겨진다. 판데믹 기간에서 집에 머무는 일이 ‘감금’이면서 동시에 ‘안전함’을 추구하는 일이었듯이, 영화를 보는 일은 환상에 머물기를 택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안전함에 머무는 일이었다. 판데믹은 거리두기의 행위가 우리의 욕망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환경적 변화에 의해 행해질 수 있다고 말하면서 영화를 하나의 구속수단으로 제공했다. 


관찰자가 된다는 건 어떠한 지위에 ‘선다’는 뜻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스크린은 관객으로 하여금 환상 앞에 서 있도록 한다. ‘환상’은 누군가의 특정한 관점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이지만 반대로 그러한 환상에 삼켜질 때 특정한 지위에 서도록 하기도 한다. 요컨대 스크린이 영화의 장소를 제공할 때는 그만큼 영화로 통하는 곳도 하나로만 고정된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많은 경우 영화는 현실을 넘어서기에 환상에 속하고, 이러한 초과를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로 축소하는 것은 스크린의 몫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를 두고서 “환상은 파훼되기 위해서만 존속한다”라고도 말할 수 있을 테다. 영화를 보는 방식이 다양해질수록 영화 또한 다양한 형태로 자신을 결정하므로 ‘스크린’에 대해 말하거나 이를 마주하는 일은 영화의 장소를 특정하기 위해서라도 정말로 중요한 일이 되었다. 스크린을 마주하려면 스크린의 앞에 서야 하고, 어떠한 지위에 ‘선다’라는 건 관찰자로서 자기의 환상을 전면화하는 작업이다. 이를 따라 서로에게는 자신의 위치를 확정 짓기 위해 스크린과와의 분리를 상정하는 작업이 선행으로 요구된다. 환상은 우리를 안전함에 머물게 하는 게 아니라 감금수단[관찰자의 기술]으로서 세계의 구조를 드러낸다. 

매거진의 이전글 무대를 등지는 사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