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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Apr 28. 2024

영화론이라는 풍경론, 풍경론이라는 레이어론


일반적으로 풍경이란 가라타니 고진이나 하이데거의 맥락에서 더 자주 논의되지만, 이것이 영화와 연결될 때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생각해본 사람은 거의 없다. 아마도 풍경이라는 단어가 주로 문학이나 미술에서 사용되었기 때문일 텐데, 무릇 인문학이란 게 그렇듯 이런 식의 단어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유되거나 오용되기 마련이다. 그러니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풍경이라는 단어를 재고해보고 싶다. 풍경이란 무엇일까? 일반론의 관점으로 설명할 때, 이는 ‘주체와 객체의 분리’로 이해된다. 근대적 시공간의 형성 과정에서, 신적 세계를 벗어난 인간은 하나의 주체로서 독립을 이루어냈다. 이를 따라 인간에게는 ‘나’라는 의식이 성립하며 이와 같은 사고가 이어져 우리의 현대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어떠한 풍경을 바라본다는 건 자신이 그에 ‘소속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가리킨다. 어떤 사고나 행위에 별다른 의문을 품지 않던 중세의 인물과는 달리, 그에 ‘의문’을 갖고서 질문을 던지게 된 게 바로 근대적 인간이라는 소리다. 


그래서 근대와 풍경의 관계는 인간과 세계의 관계이기도 하다.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기 위해 ‘자기’를 구성하듯이, 근대적 사고가 풍경을 인식하게 된 건 ‘자기’가 떨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마치 진화의 한 과정을 보는 듯한 이 사례에서, 우리는 거리두기나 판단중지의 면모를 발견한다. 주체가 세계를 발견하는 과정에서 자기를 하나의 틀로 사용한다는 말은, 자기의 앞에 멈춰선다는 것과도 같아서 결과적으로는 ‘자기에 앞서 존재할 수 없다’는 선입견을 구성하니 말이다. ‘자기’가 떨어져나온 이상, 우리는 자기에 다가서려 하지만 정작 ‘세계’는 자기를 통해서만 들여다보이기에 그에 가까워져서는 안 된다는 게 풍경론의 주된 논리이다. 풍경이 성립하려면 최소한의 거리를 두어야만 하므로, 이와 같은 거리감은 아마도 ‘본다’라는 인식을 성립시키면서 회화나 사진 같은 고정형 설치 예술로 이행했을 것이다. 어떤 풍경을 보는 일은 항상 특정한 위치의 ‘앞’에 서는 일이 되기 마련이라는 점, 이는 즉 ‘관찰자’의 등장을 의미한다. 


만약 우리가 스스로에만 갇혀있다면 영화를 보는 일 같은 건 불가하겠지만, 우리는 타인의 입장에 ‘서는 것’이 가능하다. 타인의 입장에 서는 일은 자기를 잠시 벗어나는 일이기도 하기에 관찰의 범위에 자신을 포함시킨다. 요약하면 ‘자기’로 ‘선다’라는 일이 곧 ‘관찰자’의 등장으로 이어진다. ‘자기’는 자아를 이끄는 주도적인 인격의 자리일 뿐 무언가 하나로만 고정된 것은 아니어서, 우리가 회화 작품에서 특정한 시점을 발견해서 이입하는 계기가 된다. 결국 풍경론에서 중요한 건 거리감과 판단중지라는 두 개의 행위이며 그런 점에서 ‘틀’로서의 ‘자기’란 세계에 앞서 존재할 수 없다. 헌데 이 말은 마치 세계가 선험적으로 존재한다는 말처럼 들려서, 주체의 형성 과정에 ‘독립’이라는 말을 성립시킨다. 독립이라는 표현이 ‘~로부터’라는 뜻을 내포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자기’란 세계에 상관해서만 존립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른바 ‘자기’는 세계를 넘어설 수 없으며, 이는 곧 우리가 ‘세계’를 살아가는 이유가 된다.


‘자기’는 세계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것. 풍경론은 뚜렷한 한계점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인간의 운명을 생성한 듯 보인다. 모든 인간이 주체가 되었다면, 반대로 모든 주체는 죽음에 종속된다는 뜻이기도 하므로 오히려 인간은 종교의 틀 밖으로 내쳐진 일에 부당함을 느끼게 된다. 즉 근대적 시간이 주체의 형성으로 이어진다면, 그런 주체는 세계 안에 ‘내쳐진’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풍경은 그 안에 자신이 소속될 수 없다는 사실과 그에 따른 애로사항을 동반한다. 모두가 갈라져 나온 하나를 바라보게 하지만, 모두가 돌아갈 수 없는 하나를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풍경은 파국이 된다. 풍경의 개념적 등장은 인간에게서 천국이나 지옥과 같은 영혼의 안전망이 더는 유효하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풍경은 세계에 반해 자신이 이곳에 존재함을 말해주었지만, 반대로 자신이 세계를 등질 수 없게 됨을 의미했다. 말하자면 인간은 이제 무대에 올라 평생토록 자기를 연기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풍경은 주체로 하여금 어떠한 틀 안에 들어가기를 강요하고, 그 점에서 마치 아미가라 단층처럼 작동한다. 풍경은 주체에게 틀 안에 소속될 것을 명령한다. 이와 같은 명령은 예술에서 아우라와 같은 미학적 개념으로 드러나는데, 벤야민은 아우라를 두고서 ‘가깝고도 먼 것’이라고 불렀다. 벤야민은 예술작품에 담긴 아우라는 작품 고유의 풍경과도 같아서 관람객이 다시금 현장에 돌아오는 계기를 마련한다고 보았다. 이른바 범죄의 재구성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런 망설임은, 어떤 점에서 문을 열기를 망설이는 모습이기도 한 것 같다. 문이 세계 전부를 담고 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문을 통과하는 이는 그와 같은 행위에서 소속을 바꾸려는 마음이 있다. 문은 세계에 연결되어 의식의 산란을 겪는 이들에게 하나의 경계를 제공한다. 인간의 의식은 세계 안에서 분산을 겪지만 아우라의 감응능력은 그런 와중에도 주체가 자기에 돌아오게끔 해준다. 왜냐하면, 문 앞에 선다는 건 항상 그 자리에 돌아올 수밖에 없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물이나 대상에 아우라를 느끼는 일은 죽음에 가까워지는 것과도 같아서, 자신에 완벽히 들어맞는 구멍을 발견했을 때는 정작 자신이 그 사실을 인지할 수 없다는 한계점이 존재한다. 풍경의 하나의 틀로 이해하는 일은 그 점에서 넌센스다. 어떠한 풍경의 일부가 된다는 건 더는 자기의 형태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과도 같다. 어떠한 풍경을 ‘본다’는 건 항상 문을 두드리는 일이 될 수밖에 없으며, 그러한 점에서 풍경론은 미술이나 사진, 영화와 같은 틀(Frame)의 예술로 확장된다. 만약 우리가 이들 예술에 진정으로 소속되려 한다면 그 방식은 세계의 크기에 자아를 맞추는 일이 아니라 거리감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프레이밍은 무언가를 포착해서, 재단하거나 감금하는 일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이 찢어질 때 이를 붙잡아두는 역할을 한다.  틀은 우리를 문 앞에 세운다는 점에서 어떠한 심판의 대상으로써 중세의 세계관을 재현하지만, 반대로 우리가 죽음으로 향하는 만큼이나 항상 주체를 바로 세우기도 한다. 


미술사에서 틀은 내부와 외부를 가로지르는 경계가 되어주었다. 가령 천당을 묘사한 그림이 있다면, 이 경우 틀은 인간이 특정 장소를 엿보는 감각을 제공해주었다. 이와 같은 방식은 관찰자로 하여금 틀 안에 자신을 투사하는 일을 전제했고, 이를 따라 ‘틀'은 주체의 행동을 요구했다. 세계가 움직이는 게 아니라 주체가 움직여야만 비로소 그곳에 닿을 수 있으니 말이다. 다른 한편 틀은 추락에 관하기도 했는데, 천국이 아니라 지옥에 관해서는 ‘떨어진다’라는 감각이 있어서 이 경우 ‘틀’은 최소한의 추락방지망이 되어주고는 했다. 요약해서 말하면, ‘틀’이 하나의 프레임으로 기능하는 과정은 가까운 것과 먼 것을 아우르는 방식에 그 요점이 있었다. 원근감은 ‘가까운 것’과 ‘먼 것’을 한 자리에 놓는다는 점에서 관찰자에게 이 앞에 ‘선다’라는 인식을 심어주었고, 이를 따라 프레이밍은 자기를 포착하는 수단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틀’은 가까운 것과 먼 것을 아우르는 과정에서 자기의 다양한 면모를 발견하는 수단이 되었다. 


미술사로 돌아가면 여기에는 키아로스쿠로 기법이 있다. 밝음과 어둠의 대비로 인물을 강조하는 이 인상적인 그림 기법은 빛의 세기나 강도 등을 조절하는 무대의 장치적 속성을 모방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무대극은 극의 장을 전환하는 과정에서 조명을 꺼트리거나 커튼을 치고는 했는데, 이와 같은 처사는 관객이 극에 잘 몰입하도록 장치적인 면을 숨기기 위함이었다. 즉, 키아로스쿠로에서 ‘어둡다’라는 건 ‘밝은 것’을 위해 마련된 마스킹 테이프와도 같은 것이며 이를 따라 ‘조명’은 일종의 포인터가 된다. 특히 로우키나 하이 키의 활용방식에서는 오늘날 일러스트 기법에서 그리자이유(grisaille)로 연결되는데, 그리자이유란 무채색의 그림 콘티를 먼저 그린 후에 위에 색을 덧입히는 것이어서 그림에 그림자를 후첨하기보다는 어떠한 그림의 세계에서 그림자를 ‘지운다’라는 쪽에 더 가깝다. 이와 같은 점에서 일러스트 기법으로서의 그리자이유는 극장에 불을 끈 후 특정 조명으로 인물을 강조했던 키아로스쿠로 기법과 닮아있다고 볼 수 있다. 


무대극에서 화면을 암전한 후, 무대의 특정 인물에 조명을 부과했던 이 기법은 무대 공간의 횡적인 면에 종적인 면을 부가했다. 가령 횡적으로 진행되는 연극에서 배경은 인물을 초과해있을 수 없지만 여기에 세로 폭이 더해지고 나면 인물은 배경의 앞뒤에 자유로이 숨을 수 있게 된다. 이를 따라 동일 횡에서 여러 인물이 겹칠 경우, 극은 이야기의 화자를 특정하는 일에 애로사항을 겪는데 이 과정에서 등장한 게 바로 키아로스쿠로다. 이때 ‘지운다’에서 ‘드러난다’를 도출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이를 따라가면 ‘자기’란 것은 세계를 지움으로써 ‘드러난다’라는 논리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자기’가 어떠한 생성이나 탄생이기보다 잔존이나 흔적과 같은 쓸쓸한 면으로 연결되는 것은 그 탓이다. 자기를 관찰자로 만드는 것은 더는 세계에 녹아들 수 없다는 쓸쓸함의 감정, 더는 세계에 하나 될 수 없다는 쇠락과 탈락의 감정이다. 키아로스쿠로든 그리자이유든, 주체는 마치 모나드처럼 세계에 솟구치는 존재가 될 뿐이다.[1]


종적 움직임에서 주체가 솟구쳐오는 것을 무대극의 목표라고 볼 때, 이와 같은 양상이 레이어의 일종임을 알게 된다. 레이어의 특징으로 제시되는 도면의 분리는 ‘배경’ 또한 도면의 일종이라는 점을 상기시킴과 동시에 극 무대에서의 장소 또한 주체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을 지적한다. 즉 배경은 주체의 뒤로만 있는 게 아니라 얼마든지 주체의 앞에 설 수도 있다. 밤의 장막을 대신하는 무대 커튼을 떠올리면 우리는 이러한 장치가 이야기를 다음 장으로 넘긴다는 점에서, 일종의 문과 같은 역할을 한다는 걸 알게 된다. 이 무대 커튼은 역설적으로 이야기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관객을 무대에 묶어두는데, 그렇다면 커튼의 서사적 기능이란 틀을 제공하는 것이다. 관객이 무대에 계속 머무를 수 있도록 하는 틀, ‘자기’를 무대 위에서 발견하는 일은 이와 같은 틀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를 따라 오늘 다뤄보려 하는 것은 ‘영화론’으로서의 풍경론이다.


우선 디지털 시대에 풍경이란 말이 성립할 수 있는지를 먼저 살펴보고 싶다. 풍경이라는 말이 원근감과 함께 등장해왔다면, 영화에서도 풍경은 딥포커스와 같은 기법을 통해 도입되었다고 보아야 할 테다. 딥포커스는 풀이했을 때 다중 초점 기법으로, 일반적으로 카메라의 초점이 하나의 원근감을 형성하는 것과는 달리 두 개 이상의 초점을 맞춤으로써 화면의 전면과 후면 모두를 평면에 배치하는 기법이다. 그러니까 딥 포커스는 화면 전체가 전면에 드러나는 기법이면서, 동시에 화면의 전천후로 관계를 맺는 카메라 기법이다. 이와 같은 거리두기는 기본적으로 관객이 관찰자인 이유이면서, 동시에 영화가 하나의 세계로 인식되는 이유를 설명한다. 영화는 현실과 별개이거나, 현실에 앞서 존재하는 게 아니며 오히려 우리를 멈춰 서게 하고 다른 곳으로 인도한다는 점에서 문에 더 가깝다. ‘관객’은 스크린을 넘어설 수 없으며 이와 같은 이유로 관객은 영화의 바깥에 남겨진다.


무언가를 판단하기에 앞서 멈춰서는 일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선입견이라 부를 만하다. 바꾸어 말하자면 딥포커스는 관객이 자신을 투사할 수 없게 한다는 점에서 영화에 대한 판단중지를 요구한다. ‘어디로든’ 갈 수 있다는 말은, 달리 보았을 때 어디에도 갈 수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들뢰즈는 『감각의 논리』와 『소진된 인간』에 걸쳐 회화에서의 드러남을 논한다. 이를 따르자면 ‘형상’은 세계가 지워지고 주체가 드러나는 과정을 뜻하며, ‘소진’이란 주체의 드러남이 다시금 세계에 포섭되는 일을 가리킨다. 그런데 앞서 그리자이유를 두고서 그림자를 ‘지운다’고 표현했던 걸 떠올려보자. ‘드러난다’거나 ‘지운다’라는 말은 이들 세계가 하나의 표면을 공유한다는 점을 가리킨다. 단지 전과 후로 층위가 나뉠 뿐이라는 점에서 이와 같은 현상은 다분히 레이어적이고 또 그래서 현상학적이다. 현상학이 겉으로 드러나는 표면에 대한 학문이라면, ‘레이어’란 복합적인 구성체들이 한 번에 받아들여지는 형상을 보여주니 말이다. 


풍경이란 것은 그와 같은 인식을 위해 일단은 멈춰설 것을 요구하는데, 이는 후설이 말하는 판단중지(epoché)의 사례에 부합한다. 관객이 판단중지를 요구받는 순간, 영화 속의 세계는 관객을 초과해서 존재할 수 없는 것, 즉 ‘실제’ 세계가 아니라 무대 위의 배경에만 불과하게 된다. 무대극에서 배경은 어디까지나 세계의 최후면에 자리하는 만큼, 영화도 관객의 투사를 넘어설 수 없으며 이를 따라 영화는 관객이 자신을 세계에 드러내는 표면이 되어준다. 이를 따라 디지털 시대에 풍경론은 곧 레이어론이기도 함을 지적하고 싶다. 우선 레이어는 하나의 작업대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무대의 일종처럼 보인다. 영상 프로그램이라면 타임라인일 테고 포토샵이나 클립 스튜디오 같은 프로그램이라면 작업대일 것이다. 이는 영화나 사진이 갖는 시간의 무게에 대응하는 것으로, 관객이 이에 앞질러 존재할 수 없다는 점에서 ‘틀’로서 기능한다. 레이어는 ‘흩뿌린다’라는 속뜻에 충실하게 관객을 세계에 스며들게 한다.  


들뢰즈는 분열된 자아가 영광을 노래한다는 표현으로 세계의 어둠을 긍정했다. 어둠에서 빛으로 향하는 키아로스쿠로는, 파괴의 정수를 영광의 상처로 변환함으로써 예술의 원판을 끌어낸다. 그러니까 어떤 예술이 한 명의 관객을 갖기 위해서는 오히려 한 명의 관객을 밀어내야만 하는 셈이다. 너무 다른 것들이 단번에 초점을 이루고 있다면, 여기서 시선의 추락은 어딘가에서 ‘중지’ 되기 마련이라 그 자체로 아우라를 형성한다. 가깝고도 먼 것은 ‘자기’를 대하는 다분히 일회적인 것이지만, 되려 그와 같은 한계야말로 찢어지는 자아를 붙들어놓는 것만 같다. 가령 아즈마가 모에를 설명했던 사례는 다중 초점에도 얼추 적용된다. 아즈마는 모에를 두고서 여러 매력적인 요인이 각각의 특색을 갖고 자생하지만, 정작 이를 멀리서 바라볼 때는 하나의 형상으로 비쳐진다는 점에서 특이한 면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니 영화가 세계의 밑바닥이면서 동시에 ‘실패’를 뜻한다면, 아마도 여기엔 영화론이라는 풍경론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1]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이 아비 바르부르크의 <므네모시네>에서 그리자이유와 이미지의 잔존을 연결하는 대목이 특히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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