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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Apr 28. 2024

젊은 시네필과 야만적 영화


한민수의 『영화 도둑 일기』가 출간되었다. ‘해적질의 옹호와 현양’(마테리알 7호)이라는 다소 과격한 제목으로 연재되었던 이 수기는 크게 두 가지를 다루는데, 하나는 젊은 시네필이고 하나는 본다는 것이다. 의견을 거칠게 요약하자면, 한민수는 “극장보다 비디오나 OTT를 통해 영화를 접하는 젊은 층에게서는 극장의 경험이 없기에 ‘시네필’이라 볼 수 없다”는 주장을 반박한다. 우선 기존의 시네필은 극장의 경험을 되새기며 자신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마주했던 감정들에 관해 서술한다. ‘아우라’와 같은 일회성의 경험은 자신이 그런 순간에로 돌아가려는 의지를 답습하므로 ‘시네필’ 문화는 어딘가로 나아가려는 문화가 되고 또 그런 습성을 지닌다. 그러나 젊은 시네필에게는 그와 같은 일회성의 경험이 부재하므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시네필’이 될 수 없다. 젊은 시네필은 극장에서 영화를 보지 않으므로, 극장에 불이 났을 때 그와 함께 타 죽을 용기 따위는 없다. 젊은 시네필은 여러 창을 띄워 영화를 봄으로써 언제든지 프레임 밖으로 발걸음을 옮길 준비가 되어 있고, 어떻게 보면 양다리기도 하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한민수는, 기성세대가 갖던 헤어짐의 감정이 젊은 세대에서는 ‘상실감’으로 발현된다고 말하며 시네필 간의 공통분모를 발견한다. 젊은 시네필은, 기록에도 있고 보았다는 사람도 있는 작품을 마주하기 위한 여정을 떠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상실의 감정은 기성세대의 ‘돌아가려는 의지’를 답습한다. 


상실에 대해 쓴다는 것. 무라카미 하루키는 21세기를 ‘상실의 시대’라고 불렀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를 만들었다. 신카이 마코토는 <초속 5cm>의 전부를 할애해 상실을 논했다. 하라 케이이치는 인물의 입을 빌려 “21세기를 돌려주마.”라고 말한다. 이들 사례에서 ‘상실’의 시대가 되어버린 20세기는, 단순히 과거에 대한 향수 어린 시선이기보다 어른이 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내포한다. 어른이 되는 일은 자신의 신체에서 연속되는 것으로써, 과거의 자신이 여전히 자신으로써 ‘변한다’라는 인식이 있기에 되려 ‘자기’에 대한 무기력함을 형성한다. 단절이나 끊김이 발생한다면 차라리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위안받았겠지만, 이 모든 일이 자기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은 벌어지거나 발생한 일에 책임을 지게 하며 말하자면 ‘어른’은 더는 도망갈 곳이 없는 존재여서 ‘현재’를 과거에 덧씌워야만 한다. 신체는 저장 용량에 한계가 있으므로 모든 것을 안고 갈 수 없다는 것, 특히나 ‘버려야 할 것’에는 자기조차 포함된다는 게 이 구조조정의 슬픔이다. 그야말로, 상실의 시대란 구조조정의 시대와도 같은 셈이다. 이 점에서 젊은 시네필의 초상은 영화에 죽을 수는 없다는 생존의 감각에 더 가까우며, ‘영화관’이라는 공간이 더는 대피소가 아니라 불이 나면 죽기에 십상인 ‘밀폐공간’으로 이해되는 현실이라 볼 수 있다. 백룸과 같은 밈의 유행이 탈출구의 ‘없음’을 단적으로 드러내듯, 21세기의 극장은 ‘야만’이다. 


가령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는 이런 장면이 존재한다. 영화가 시작하면 흑백판본의 인물에 점점 컬러가 덧입혀지면서 애니메이션의 ‘동화’로써 기능하게 된다. 그리자이유로 시작되는 이 기법이 무대극에서의 로우키에 대응하는 것을 고려하면, 영화는 아무쪼록 인생이라는 그라운드에 서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미지에 물성이 부여되는 순간은, 어떤 면에서 만화가 연재되던 당시의 세대에게 흘러가버린 시간을 부여잡을 수 있게끔 ‘물성’을 부여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후 영화는 송태섭의 어린 시절을 보여주는데, 어린 태섭은 자신과의 약속을 어긴 채 바다로 떠난 형을 향해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라고 말한다. 그대로 형이 실종되어버리고, 농구를 좋아하던 태섭은 형의 뒤를 따라 농구에 매진하지만 우수한 선수였던 형과 매번 비교당하는 처지에 놓인다. 이후 장면이 바뀌어 현재로 돌아오지만 태섭은 여전히 형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으며 한편으로는 그런 형을 그리워하기도 한다. 요약하자면 흑백에서 컬러로 전환하며 코트에 들어서는 이 영화는 어떠한 상실의 감정을 갖고 있으며, 특히 농구 경기를 중심으로 보여주는 내러티브는 어떠한 승리를 추구하기보다는 상실을 들여다본다는 느낌이 강하다. 영화 내내 드리워진 형의 그림자는, 태섭의 팔에 채워진 형의 손목밴드를 통해 과거를 등지고 있음을 묘사하며 이를 따라 ‘산왕전’은 말 그대로 모든 것을 끝내는 경기가 된다. 


슬램덩크의 오랜 팬들은 영화를 여러 번 보는 일에서 태섭의 서사가 방해된다고 말하면서, 경기 장면만 줄곧 돌려보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태섭의 이야기가 없었다면 영화는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다. 원작의 영화판본이자 어떤 점에서는 독립된 판본이기도 한 이 작품은, 죽은 형에서 멀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에서도 안팎으로의 독립을 실천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20세기의 시네필은 현실을 끝내고자 극장에 갔다. 현실은 야만적이어서 적어도 영화는 그들에게 대피소가 되어주었다. 그러나 <에반게리온>의 절망이 이와 같은 세기를 끝내고 나면, 21세기의 시네필은 현실이 되고 싶어 극장에 간다. 그들은 영화가 물성화된 꿈이라고 여기며 이런 꿈은 시각적으로 목격되거나 비평적으로 조각낼 수 있기에 거칠고, 폭력적이고, 야만적이다. 21세기의 시네필은 영화에서 자신의 삶을 출발시키며 어른이 되는 게 아니라, 반대로 영화에 종속되어 유년기를 파고든다는 점에서 오히려 자신의 원추 경험으로 돌아갈 뿐이다. 결론적으로 젊은 시네필에게 ‘독립’은 불가능하며 이들에게 영화는 잃어버린 것을 대변한다는 점에서 수복해야 할 영토로 이해된다. 21세기의 미디어 지형에서 영화는 그들이 경험해본 적이 없는 레트로 문화에 편승하는데, 이와 같은 맥락에서 대해적의 시대는 단순히 잃어버린 영화를 찾아 헤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이른바 해적이 된다는 건, 잃어버린 자기에로 돌아가려는 회귀의 성질을 따른다. 


태섭은 형의 죽음 이례로 한 번도 자기로 있어본 적이 없었다. 태섭은 항상 형의 그림자였고 그래서 형을 넘어설 수 없었다. 그 점에서 산왕전은 형을 넘어서 ‘자기’로 존재하려는 태섭의 이야기였기도 했다. 하지만 ‘정품’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신화에 불과해서, 어느 게 정말로 원본인지는 알 수 없다. 가령 태섭을 형의 열화된 버전이라고 생각할 경우, 태섭이 산왕전을 승리로 마주한 이후에는 이런 관계가 역전되어버려 무엇을 정품으로 규정할지는 다소 애매해진다. 따라서 이와 같은 구도에서는 여러 판본이 동시 다발적으로 네트에 존재함으로써, 그와 같은 판본 중에 먼저 수면에 드러나는 게 ‘초기’ 판본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 고고학적으로 풀어가기보다는 어떠한 구도로서 이를 바라보자는 것이다. 하나의 쇼트 안에서 소품이나 배경은 줄곧 유동하곤 하지만, 이들이 사물로서 관객에게 다가서는 것은 특정한 발견의 순간임을 떠올려보자. 이와 같은 가정은 어쩌면 태섭이 산왕전에서 형을 넘어선 것은 재능의 상승곡선이 드디어 형의 파라미터를 넘은 순간, 크로스의 순간임을 추론케 한다. 물론 형이 살아있었다면 파라미터는 줄곧 상승했을 것이므로 크로스의 순간은 뒤로 밀렸겠지만, 오히려 태섭의 형이 시작점에서 죽은 덕택에 영화의 중요한 지점에서 태섭의 ‘독립’을 보여줄 수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산왕전은 태섭이 어른이 되는 이야기면서, 정품이라는 게 신화에 불과함을 보여준 사례에 속한다. 


풍경론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보고 싶다. 풍경론으로 영화를 바라보는 일에서 중요한 건, 가까운 곳과 먼 곳이 동시다발적으로 존재하는 일에 대한 ‘이례성’이 바로 영화의 아우라를 구성한다는 점이다. 앞서 말했듯이 ‘딥 포커스’는 원근법이면서도 동시에 무대를 꾸민다는 점에서 ‘레이어론’의 초석을 이룬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같은 작품에서 여러 다양한 구성들이 이루어짐을 떠올리면, 이와 같은 표현이 의미하는 바는 다소 명징하게 이해될 것이다. 이들 프레임을 통해서만 이들 세계는 ‘존재’한다. 바로 여기에 영화의 고유함이 있는데 가령 미학에서 풍경론의 원류를 살펴보자. 미학에서 풍경론이 ‘바라보는 것’과 ‘소속되어 있지 않음’이라는 두 개의 구도로 풀이되었던 것은, 무엇보다 ‘극복’에 초점이 있다. 서양화가 자연을 극복의 대상으로 바라보았던 반면 동양화는 자연과의 공존에 초점을 맞췄는데, 이와 같은 가치관 차이는 서양세계에서의 ‘레벨링’ 즉 ‘단계’를 구성했다. 서양세계는 『신곡』 같은 묘사에서처럼 벽, 계단, 계급 같은 요소에 익숙했고 여기서 ‘자연’은 극복의 대상이 되는 만큼 그것을 딛고 일어날 수 있는 것이었다. 반대로 동양세계에서는 수묵화의 묘사처럼 보이는 만큼의 크기가 곧 한 자리에 공존한다는 시각론을 중시했는데, 이를 따라 동양에서는 외관상으로 구분되더라도 문화나 풍습이 같다면 ‘자기’의 범주에 넣는 게 그리 이상하지 않았다. 


풍경론으로서의 영화에서 중요시되는 건 후자로, 이는 ‘자기’의 개념과 연관된다. 딥 포커스와 같은 기술이 연극론과 결합하고 나면 하나의 쇼트는 평면 스크린에 다수의 레벨을 펼쳐둔다는 점에서 일종의 ‘무대’가 된다. 이 경우 무대에서의 배치를 뜻하는 미장센은 배치의 양상에서 각각의 레벨을 발견하게 함으로써, 그리고 이와 같은 배치의 중첩에서 여러 세계의 공존을 발견하게끔 한다는 점에서 동양적 가치에 더 가까워진다. 중요한 건 ‘무대’인데, 여러 것들이 한 자리에 펼쳐져야 함은 이들 세계 중 하나를 취사선택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이들 모두가 동시다발적으로 관측되어 존재한다는 점에서 어느 하나를 배제하지 않는다. 가령 서양에서 천국이나 지옥 같은 개념은, 양자택일의 문제로 여겨졌지만 동양에서의 ‘내세’란 ‘죽으면 가는 곳’으로 추상화되며 이와 같은 개념에서는 상승이나 추락, 둘 중 어느 풀이도 성립하지 않는다. ‘내세’는 귀신이나 요괴가 일상에서 인간들 사이에 섞여 있고 또한 어떠한 원한을 풀어주어야만 성불한다는 점에서, ‘죽음에서 돌아온 망자’ 같은 개념보다는 어떠한 면에서의 ‘공존’에 더 가깝다. 요약하자면 풍경은 어떤 세계가 가깝거나 멀다고 말하지만, 이들 모두가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영화가 여러 다층적인 세계로 구성되어 있으면서 이들 모두가 빠져나갈 수 없거나, 혹은 추락하지 않도록 무대가 되어주는 일이 바로 풍경으로서의 영화다. 


풍경론으로서의 영화가 갖는 특징은 바로 그 ‘무대’가 ‘자기’가 되어준다는 점이다. 영화에 공존하는 여러 다층적인 레이어는 어떤 이유에서든 자기를 넘어설 수 없다. 여러 사건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질 때 그 모든 일의 중심에 선 자신이 이를 해결해야 하듯, ‘영화’는 모든 일에 중심에 선다. 영화는 우리 세계가 얼마나 많은 레이어가 겹쳐있는지를 포착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의미 있지만, 반대로 그 모든 세계를 바라본다는 점에서 우리 자신을 세계의 바깥으로 추방하기도 한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일은 “한 번도 되어본 적 없는 자기”가 되는 것이다. 자기에서 원본을 찾는 일은, ‘정품이라는 신화’에 의거하여 자기를 하나로 규정하고자 하는 움직임이다. 자기가 여러 순간으로 찢어질 수밖에 없음에 통탄하면서, 동시에 찢어지는 것들 사이에서 ‘자기’의 고유함을 발견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이른바 ‘풍경’이란 멀어지는 것들 사이에서 바로 이곳의 자신을 발견한다는 점에서 인간의 찢어지는 삶을 하나로 그리는 효과가 있다. 영화를 보며 ‘빠져든다’라고 일컫는다면, 이와 같은 일은 우리가 영화를 보며 앞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영화가 개인의 삶을 바꿀 수 없다는 비애감을 자아낼 뿐이다. 어떠한 무대에 선다는 건 그것이 자신의 한계가 되기보다는 한 개의 자신이 되는 일에 더 가깝다. 말하자면, ‘선다’라는 것은 영화를 두고서 자신의 입장으로 삼기보다는 영화를 보는 행위에 동반하는 관객으로서의 입지를 뜻한다. 


관광객은 해당 지역의 거주민이 아니기에 오히려 장소를 하나로 받아들이지 못한다고들 한다. 가령 지역 거주민에게 골목은 익숙한 곳이지만 관광객에게는 또 하나의 세계이며, 그런 점에서 사방으로 뻗은 골목은 도시의 다양한 속내를 내비친다. 그리고 젊은 시네필은 확실히 디지털 네이티브라는 말이 있는 것만큼이나, 극장이라는 지역의 원주민이 아닐 테다. 이들에게 극장은 삶 일부이기보다 이전에 더 가까우며 그렇기에 찢어지는 삶에 대한 회복의 시도로 보인다. 엔트로피가 삶을 찢어놓는다면, 이전으로 역행할 때는 그게 치유될 수 있으리라고 그들은 믿는다. 이들은 극장을 하나의 장소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 근경의 삶을 구하고자 원경의 영화로 떠나는 여정의 일부 삼는다. 따라서 해적질은 상실에 대한 테라피이면서 동시에 신체의 기능을 모방한 ‘무대’를 찾아 떠나는 여정이기도 하다. 이처럼 영화를 보는 일에 수행성을 부여하는 일은, 당사자의 관람에서 어떠한 행위성을 발견하지만 그와 같은 행위가 비자발적인 것이 될 때 추락의 한 징후에만 머무른다. 영화의 딥 포커스는 세계의 다양한 면을 한 자리에 모아두는 역할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영화의 내부에 포섭되지 않고서 관객을 통과시켜버리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신체가 가장 고유한 것이기에 탈출 불가능하면서 동시에 추락의 방지망이 되어주듯, 무대를 찾아가는 여정 자체가 회복의 서사가 되는 일은 “꿈속에서 불가능한 것은 죽음이 아니라 숙면”이라는 문구를 생각해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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