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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Apr 30. 2024

‘열차’는 그렇게 말했다


영화에서 리얼리즘의 의미를 생각하면, 영화에서 렌즈의 역할은 아마도 비-현실감을 주기 위한 것일 공산이 크다. 렌즈란 무언가를 통해 이곳이 들여다보아지고 있음을 전한다. 곧바로 전해지는 질감이 아니므로 우리가 마주하는 영화는 적어도 ‘원본’은 아니다. 따라서 관객이 영화에서 렌즈의 개입을 눈치채는 순간 영화는 우리의 현실에서 분리되고야 만다. 영화에서 렌즈의 효과를 제거한다면 현실성이 강화되고, 반대로 렌즈의 효과를 부여한다면 비현실성이 강화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영화 같은 느낌을 주려고 노력했던 애니메이션들에서 렌즈는 어떤 역할일까. 이미 현실이 아닌 곳이므로 렌즈의 질감에서 ‘비현실성’을 획득하려 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그저 영화처럼 보이고 싶을 뿐이라면, 최대한 극화체에 가깝게 그리거나 아니면 컷이나 쇼트와 같은 몽타주 기법만을 사용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은 질문점을 안고서 이야기를 이어가 보자. 렌즈 효과는 렌즈를 통해서 바라보아졌다는 점을 관객에게 전하는 일에 중점을 둔다. 렌즈의 왜곡을 통해 사물의 크기를 왜곡하는 일은, 기실 리얼리즘을 추구해야 할 영화와 맞지 않을뿐더러 더 나아가서는 효과 자체가 다분히 ‘영화적’이므로 ‘생생함’과는 거리가 멀다. 이와 같은 이유로 렌즈 효과는 ‘영화만이 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왔던 게 사실이다. 영화의 리얼리즘은 렌즈와 같은 기술의 표면에 머물러있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영화는 리얼리즘에 반대하는 방식으로 인기를 끌었는데 가령 히치콕의 <현기증>과 같은 영화 등에서, 렌즈 효과는 영화의 특장점을 부각했고 이는 곧 영화관에 와야만 할 이유가 되었다. 렌즈 효과는 그 속내에서 영화의 질감을 살리는 것에 목적이 있었고, 이와 같은 점에서 상업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영화적=상업적이라는 뜻일까. 일상의 예외적인 부분을 파고든 영화가 인기를 끌었다고 가정하면, 비일상적인 것이 곧 영화적이라는 뜻이 된다. 사진기를 통해서만 발견할 수 있었던 세계와 마찬가지로 관객에게 ‘영화’란 일상의 ‘바깥’으로 여겨졌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 또한 ‘프레임’의 바깥을 중요시한다는 점인데 이는 아래에서 후술하도록 한다. 어쨌거나 중요한 건, 영화가 그 자체로 어떠한 세계의 ‘바깥’으로 여겨진다고 가정할 때 ‘영화의 리얼리즘’이란 것은 ‘~로부터’라는 점에서 ‘독립’되어있다는 점이다. 이는 이하의 두 개 사실로 이어진다. 첫 번째는 영화가 항상 배면에 무언가를 둔다는 점이다. 영화는 세계의 그림자이므로 원피사체가 없으면 형성될 수 없다. 두 번째는 영화가 항상 무언가와 연결된다는 점이다. 즉, 영화는 프레임이라는 구도상에서 감금된 듯 보이지만 사실은 아니라는 것이다.  


어쩌면 그런 이유로, 영화는 보는 이들에게 고립의 감정을 전했을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통해서만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는 말은, 히치콕의 유명한 영화인 <이창>에서처럼 자신이 감금의 상황에 있다는 관객의 처지를 부각한다. 발터 벤야민의 지적대로, 관객은 하늘을 향해 손을 내미는 어린아이와도 같았다. 관객이 바라본 영화 속 세계는, 현실에 의해 작성되었고 현실과 연결되었지만 정작 현실이 아닌 곳이었다. 마치 열린 하늘이 대지와 연결되었지만, 어떠한 도구나 수단 없이는 갈 수 없던 것처럼, 관객에게 영화는 전적으로 ‘자유’를 의미했다. 그렇다면 오히려 영화는 어떠한 해방감을 준다는 점에서 ‘열린’ 쪽에 가깝다. ‘영화적’이라는 영화의 리얼리즘은 프레임 너머로 펼쳐지는 어떤 풍경들에 관한다. ‘영화적’이라는 표현은, 그야말로 프레임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현실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경우라면, 우리가 일상에서 ‘영화 같다’라고 느끼는 일에 대해서도 설명이 가능하다. 영화는 프레임 안에서만 존재하지만, 그와 같은 프레임은 스스로를 제약하는 일에서도 발생한다. 영화의 주된 기능 중 하나는 우리가 어떤 현실을 포착할 것인지에 관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열린 사고를, 열린 무대를 집약해 한눈에 들어오도록 조율하는 것이었다. 영화는 프레임 안으로 어떤 현실을 감금하는 것만큼이나 어떤 현실을 보존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렌즈’는 관객에게 바깥의 ‘열림’에 대항하여 내부의 ‘닫힘’으로써 기능했다. 객석에 앉아있어야만 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관람을 위해 스스로의 자유를 속박하는 일은 ‘영화’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감금’에서 출발한다는 점을 깨닫게 한다. 카메라 또한 기본적으로 프레임을 응용한다는 점에서 자유분방한 세계의 ‘고정’을 요구하니 말이다. 


세계는 자유롭다. 그러나 영화 안에서 세계는 무언가를 바라보기 위해 스스로의 자유를 헌납한다. 영화를 본다는 것은 바로 이처럼 열림을 위해 닫힘을 희생하는 일이다. 렌즈를 통해 들여다본 세상이 암시하는 건, 그런 렌즈에 비친 세상이 돌려주는 관객의 현실이었다. 영화를 보는 관객이 자아를 프레임 내부에 의탁하는 일은 흔하므로, 어쩌면 누군가는 그런 시도가 위험하다고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초점이 ‘맞는다’는 건 영화를 ‘본다’는 말과도 같다. 마조히즘의 특성이 주체의식을 타인에 의탁하는 일이라는 점과 마찬가지로, 렌즈는 관객의 시선을 영화에 의탁하는 효과가 있었다. 영화를 보는 관객이 렌즈를 발견할 때란, 시야를 제공하는 하나의 관점을 발견할 때와 같았다. 이런 점에서 렌즈를 통해 무언가를 바라보는 건, 보존의 영역이 줄어들고 영화와의 연결고리가 줄어들 때 ‘연결’을 지속하려는 시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열차의 시작>이라는 영화사의 시작점을 떠올려보자.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시각적 전회 중 하나는, 네모난 창문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이었다. 열차의 발명은 창문 밖을 내다보는 ‘감각’을 인류에게 선물했고 이런 맥락에서 ‘프레임’은 회화의 움직이는 판본을 상상케 했다고 보아도 좋다. 이전까지 ‘프레임’이란 그 내부에서 배우가 무언가를 연기하고, 무대의 밖으로 나선다는 점에서 하나의 ‘고정형’이었지만 열차의 발명은 그와 같은 ‘프레임’에 운동성을 부여했던 것이다. 달리는 와중의 한 ‘장면’을 들여다볼 뿐일 수도 있다고, ‘열차’는 그렇게 말했다. 마치 코페르쿠니쿠스의 발명처럼 세상이 프레임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프레임이 세상을 중심 삼아 이동할 수도 있다고, ‘열차’는 그렇게 말했다. 그런 점에서 열차를 통해 연결된 운송망은 영화가 인간의 신경망을 대신한 일과 무관하지 않다. 


영화는 분명 어딘가를 바라본다는 점에서 이전 시대의 예술의 연장선에 있다. 본디 ‘극장’은 오페라를 비롯한 연극이 상연되는 곳이어서 어딘가에 진득이 앉아만 있는 일이 영화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다만, 이와 같은 ‘감금’의 상황에서는 오히려 세계를 향해 ‘열림’을 획득한다는 점이 영화의 특수한 위치라 할 수 있다. 마치 어린 왕자가 상자에서 어린 양을 상상했듯이, 영화는 프레임 바깥에 있는 ‘풍경’을 상상케 했다. 예를 들어 뤼미에르의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에는 화면의 밖으로 사라지는 사람들의 모습이 있다. 관객은 이와 같은 관찰에서 ‘프레임’을 하나의 구조물로 여기기보다 “제한된 시야”로 인식했다. 요는 영화가 프레임과 연결됨으로써 이것이 어떠한 ‘세계’ 속에 있다고 여겨졌다는 점이다. 무대에서 내려오면 그대로 사라지고야 마는 연극과는 달리, 영화에서 프레임은 ‘없음’이 아니라 ‘바깥’을 암시했다. 


뤼미에르의 상영회가 우리에게 전한 건, 주위를 둘러보는 ‘풍경’의 감각이었다. 프레임 너머의 풍경은 프레임을 준거점 삼아 안과 밖의 속도 차를 전달했다. 즉 프레임은 일종의 고정 초점 기술과도 같았다. 그렇다면 영화를 보는 우리는, 영화의 이전과 이후 둘 중 어느 곳을 살아가는 걸까? 흔히 영화를 보는 시선은 안과 밖의 두 개로 나뉘는데, 전자가 영화를 독립된 세계로 바라본다면 후자는 영화를 보존의 대상으로 삼는다. 기술사에서 렌즈는 본디 광학 기술의 일환으로써 도구로만 취급되었으나, 이와 같은 렌즈는 검은 암실과 결합해 하나의 ‘세계’를 창조해냈다. 바로 이 검은 암실이 ‘상’이 맺히기 위해 요구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영화가 시작하고 불이 꺼질 때 극장의 역할은 세계의 전망대다. 영화를 지켜내야 할 세계로 본다면, 렌즈의 역할은 우리가 그에 돌아가야 한다는 상실의 감정을 자극하는 일이다. 


영화가 우리가 잃어버린 세계라면, 렌즈는 그에 대한 상실감을 우리에게 전한다. 관객은 왜 영화를 통해서만 이와 같은 관점을 발견했던 것일까? 그건 바로, 관객 스스로가 한 사람의 행위자여서다. 영화와 관객 사이의 공통점이기도 한 ‘운동성’에 관해서 우리는 관객 자신이 줄곧 이동 중에 있다는 점을 거론해야 한다. 인간의 지각은 시간과 깊이 연결되어 있어서,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면 인간의 사고 또한 진행되지 않는다. 아무런 정보도 수신받지 못하면 인간은 고장나 버리고야 마는 셈이다. 마찬가지로 영화에서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는 건 영화가 가진 정보량이 극도로 제한된다는 점을 뜻한다. 영화가 아무런 내용 없이 그저 거리를 찍었을 뿐이라도 그곳에는 ‘시간’이 흐르기 때문에 하나의 정보가 될 수 있다. 렌즈 효과가 전하는 비현실감은 극장의 어둠이 감춰놓은 시간을 ‘드러낸다’고 보아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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