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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May 01. 2024

인생영화와 가족의 형태


인생영화라는 표현을 두고서, “인생의 순간에 떠오르는 영화는 매번 바뀌므로 이를 꼽을 수 없다”고 소명했던 사람이 있다. 아마 대부분의 비평가가 이에 동의할 것이다. 어떤 작품을 두고서 평가를 내리는 일은, 작품의 형태를 규정한다는 점에서 잠재적인 가능성을 해치기도 한다. 자기가 하는 말이 누군가의 앞날을 막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누구라도 말을 조심하게 될 것으로 생각한다. 여하튼 이와 같은 말은 삶의 몇몇 순간을 자신이 결정하기보다, 삶의 몇몇 순간에 자신이 결정된다는 점을 염두에 두는 듯하다. 우리는 자기가 영화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 영화에 의해 말해지기를 원하니까. 존 포드의 영화를 보면서 카우보이의 모습을 떠올리거나,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를 보면서 부모가 된다는 일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혹은 <화성침공>이나 <컨택트>처럼 외계인이 지구에 찾아오면 어떨까 하는 공상을 해볼 수도 있겠다. 혹은 스필버그가 영화가 만든 자서전인 <파벨만스>처럼, 영화는 실현되지 않은 현실이기도 하다는 걸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영화가 보여준 것을 우리 자신의 현실로 받아들이고자 노력하는 일은, 영화가 먼저 나서서 이를 보여주지 않았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미래이다. 누군가가 꿈의 편린을 먼저 보여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자신이 그런 꿈을 꿀 수 있다고 생각조차도 못 했을 테다.


게임 [붕괴: 스타레일]의 페나코니 지역 이야기에는 가족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게임에서 가족은 ‘화합’을 추종하는 사람으로 이루어져, 출신구성이 서로 다르지만 해당 분파에 속하면 어떻게든 화합을 구성해야만 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니까 여기서 [가족]은 개인의 욕망을 빼앗는다는 점에서 개개인의 존재를 긍정하지 않으며, ‘화합’은 표면적인 가치로만 여겨진다. 욕망을 잃은 사람들로만 이루어진 집단은, 역설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단체에 헌납하기 때문에 개인의 욕망이 스스로에 의해 관측되거나 판단할 수 있게 되는 부작용을 낳는다. 그런 점으로 보면 [가족]은 굉장한 마조히스트 집단인 셈이다. 정신적인 문제로 바라보는 마조히즘은, 개인의 선택과 판단을 타인에게 맡김으로써 그에 따른 책임의 주체가 되지 ‘않는’ 것에서 즐거움을 찾는다. 즉 마조히즘은 ‘한 번도 되어본 적 없는 자기’가 되는 일이라는 점에서, 인생영화의 기능과 어느 정도 닮아있다. 인생영화라는 말은, 그런 인생이 될 수 없다는 사실 자체에서 가능성을 배제한 ‘우연’ 자체만을 받아들인다. 인생영화는 어떠한 목록으로 작성되지만, 이와 같은 목록은 표면적인 화합에만 불과해서 가족이 되기보다는 인생의 영역에 속하고자 개인의 욕망을 빼앗긴 것에 더 가깝다. 그러니 인생영화라는 말은, 영화 자체보다 영화가 자신의 인생을 구성하고 싶어하는 이들의 자기표현방식이다.


[페르소나5: 더 팬텀]은 욕망을 빼앗기는 현상인 ‘팬텀’의 국지적인 유행을 다룬다. 욕망을 빼앗겨 세상을 주체적으로 살지 못하게 된 이들에게서, 사건에 대한 판단은 타율적이다. 게임은 ‘자신의 욕망을 직시한다’라는 것으로 페르소나를 각성하는 과정을 그림으로써 욕망이 폭주한 이들 ‘팬텀’을 치유하는 과정을 그린다. 그러니까 굳이 설명하자면, 게임은 ‘욕망이 있어야 한다’고 보는 쪽이다. 어떤 욕망이든 간에 그게 자신에서 비롯된다는 점만 직시한다면 별다른 문제는 없는 듯하다. 선악은 도구를 사용하는 사람의 몫이듯, 욕망 자체는 도구에 불과하며 선인과 악인만이 있을 뿐이라고 말이다. 마찬가지로 인생영화라는 말은, 영화에 의해 자신이 구성되기를 바라는 것이기는 해도 그것만으로 이렇다 할 판단은 할 수 없다. 날 때부터 가족인 관계가 있다면, 반대로 가족에 소속됨으로써 그런 삶으로 향하고자 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가족의 첫 번째 기능은 연결에 있다는 점에서 가족 자체는 하나의 도구에만 불과하기 때문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같은 걸 보면, ‘아버지’란 존재는 아버지의 ‘이름’을 통해 부성애를 발휘한다고 묘사되기도 한다. 인생영화도 마찬가지다. 영화에 삶을 의탁하는 행위란, 어떤 면에서 그러한 이름 사이를 연결하는 과정 자체에서 의미를 찾는 게 아닐까. 


영화에 접근하는 방식은 아마도 다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영화에 대한 입장을 갖고서 이를 대하는 일이고, 하나는 영화에서 어떤 입장을 발견해 이를 자신의 것처럼 여기는 일이다. 둘 중 무엇을 택하든 간에 영화는 그냥 거기에 먼저 있을 뿐이다. 이따금 우리가 사용하는 ‘영화적’이라는 말은 영화가 거기에 있다고 여긴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이와 같은 만남이 우연에서 발견된다는 점에서도 영화와의 유대를 형성한다. 이러한 우리가 영화에 앞서 존재할 수 없기에, 그만큼 우리 자신이 묶여있을 만큼 튼튼할 수 있노라고 추측게 한다. 그러니 영화에 욕망을 의탁하는 일은 영화가 하나의 [가족]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일이기도 한 것 같다. 아즈마 히로키의 의견을 빌리자면, 영화를 통하지 않고서 인생과 연결되는 회로를 모색하는 일이 바로 ‘인생영화’의 문제의식을 구성한다. 영화가 선험적인 것만큼이나 [가족]은 우리에 앞서 존재한다. 우리가 혈연관계를 스스로 정할 수 없다면, 우리가 원하는 가족의 형태가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자신의 삶을 똑 닮은 영화를 찾은 것만큼이나, 우리가 원하는 영화의 형태가 어딘가에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인생영화는 이들 모두를 아우른다. 영화에 앞선 삶이거나, 삶에 앞선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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