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ross the Universe

to meet you, 지구 반대편으로 음악 성지 순례를 떠나다

by 수크림

락음악에 대한 나의 음악적 관심의 태동과 성장은, 브릿팝의 번성과 궤를 같이 했다. 학창시절 내내 주변에 브릿팝 애호가가 끊이지 않았고, 다음넷에서 영국팝이라는 카페도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던 시절이었다. 자연스레 나의 관심도 영국 밴드들에게 쏠릴 수 밖에 없었다. 누군가가 "마음이 황량할 때 이보다 좋은 게 없다"고 했던 Radiohead에게 푹 빠진 것을 비롯해 대중적으로 가장 인기를 누린(누리고 있는) Coldplay, Blur, Starsalior, Travis, Suede, Placebo 등에 심취했다.


따라서 대학 시절 아르바이트를 해 수중에 수 백만원을 쥐게 되자마자 가장 먼저 런던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왠지 그 곳에 가면 뭔가가 있을 것 같았다. 브릿팝에 대해 지금도 모르지만 더 모르고 더 모르던 시기였다. 하지만 어쨌든 원산지(!)에 직접 가면 어떻게든 되겠지, 라는 생각이 있었고, 아무런 계획 없이 런던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추가: 어릴 때 포항제철에 견학가서 철의 제조 공정을 본 적이 있었는데, 커다란 기계들이 시뻘건 쇳물을 꾸역꾸역 토해내면 그것이 마그마처럼 철철 넘쳐 나와 컨베이어에 실리고는, 이리저리 보내지는 공정을 유리벽 너머로 구경하는 것이었다. 어린 나이에 그 광경을 본 뒤로 갑자기 세상의 모든 철이 더이상 묵직한 쇳덩이가 아니라, 한 때는 여리고 몰랑몰랑 했으나 모진 세월 때문에 굳고 차가워진 안타까운 사연의 주인공처럼 보였던 기억이 있다. 이거랑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브릿팝의 기원지에 성지 순례를 가는 것은 왠지 숙명처럼 느껴졌다.)


아주 키가 큰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다. 북반구일수록 해가 멀어 해에 가까워지고자 사람도, 나무도 목을 쭉 빼고 높이 자랄 것이라는 나의 가설이 증명되어 있는 광경을 흡족하게 구경했다. 내 키가 작지 않은 편인데도, 사람들의 가슴팍을 스쳐가는 바람에 괜히 아랫공기를 마시는 느낌이 들어 까치발을 들고서 런던 시내를 바지런히 돌아다녔다.


당시 런던에서 유학 중인 친구가 있어, 며칠은 친구네서 머무르기로 했다. 친구는 집이 Abbey road 근처라며 자랑했고, 친구네 짐을 푸르자마자 다음날 아침 Abbey Road로 향했다.


정말 몇 걸음 걷지 않아 Abbey Road가 나타났다. 사실 Abbey Road는 아주 특징적인 거리가 아니고, 횡단보도가 있는 평범한 2차선 도로에 불과해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가 서 있지 않고서는 여기가 Abbey Road인지 아닌지 알기 어려운 곳이다. Abbey Road라는 푯말도 그닥 인상적이지 않다. 횡단보도에 넷 씩 서서 포즈를 취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제서야 누구든 이 곳이 Abbey Road라는 걸 확신하게 된다.


...그리고 나 또한 깨달았다. '무작정 떠나자'고 결심하는 바람에 이번 여행에 내가 빠뜨린 가장 중요한 준비물은 세 명의 동행이었다는 것을... Abbey Road에 왔으면 당연 앨범 자켓의 느낌을 풀풀내는 인증샷을 찍어야겠으나 어떻게 해도 혼자서는 외로운 그림이었다. 친구는 나의 성지순례를 망칠세라 동서남북을 뛰어다니며 다양한 앵글로 사진을 찍어 주었지만 나를 복붙해 네 명 붙이지 않는 한, Abbey Road 인증샷은 완성될 수 없는 것이었다. 숫기가 없어 차마 외국인들에게 사진을 같이 찍어달라는 말이 떨어지지 않는 때였다... 횡단보도 한가운데서 걷는 포즈를 해도, 다리를 직각으로 들어도, 재빠르게 뛰어봐도... 나의 Abbey Road는 미완성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순번을 기다리며 초조한 눈으로 나의 몸부림을 바라보는 파란눈, 갈색눈, 검은눈 때문에 더 이상은 촬영을 계속할 수 없었다. 다음에 이 곳을 다시 오게 된다면 반드시 네 명을 맞춰 오리라...


(어쨌든) 나는 Abbey Road를 끝으로 비틀즈 관광을 끝냈다고 생각하고 지하철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Abbey Road 근처 지하철역 입구에 Beatles shop이 있었는데, 역시 성지라 다르구만! 하고 생각하며 왠지 여기서 뭐라도 사야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우연찮게 조금 더 걷다보니, 다른 Beatles shop이 하나 더 나타났다. 그리고선 곧 김밥천국 같은 빈도로 크고 작은 Beatles shop들이 나타났다. 그것들은 Abbey Road 주변에만 있는 게 아니고 번화가에도, 골목길에도, 쇼핑몰에도 있었다. 게다가 그 안에서 판매하는 goods의 종류는 너무도 다양하고 다양해, 세상에 있는 모든 물건에 비틀즈를 붙인 것 같았다. 찾아보진 않았지만 비틀즈 손톱깎이나 운동화도 있을 기세였다. 가장 인기 품목은 (주로 냉장고에 붙이는) 마그네틱이었는데, 멤버 인기 투표를 하듯 누군가의 이름은 거의 품절되어 가고 있었다.


이 도시는 내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이 그리고 깊이, 비틀즈를 추억하고 있었다. 히피 차림을 한 10대들이 드나드는 햄버거 가게도 비틀즈를 틀었고, 저녁에 사람들이 몰리는 펍에서도 비틀즈가 흘러나왔다. 고풍스러운 고급 호텔은 비틀즈의 곡을 편곡한 클래식을 틀었다.


비틀즈를 기억할 방법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덕분에 나는 좀 더 본격적인 비틀즈 메모리얼 투어가 하고 싶어져, 비틀즈의 고향인 리버풀 당일치기를 계획했다. 사실은 올 때부터 무계획이었고 모든 일정표가 공란이었기 때문에 당일치기를 계획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_-; 어떤 비틀즈 샵에 리버풀 one day 투어 리플렛이 있길래 당당히 예약하고, 다음 날 리버풀 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리버풀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비틀즈 투어"가 모이는 장소를 물었더니, 비틀즈 투어가 너무 많아 어느 것을 말하는지 알 수 없다고 했다... 예상치 못한 답변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많고 많은 투어 중 내가 예약한 투어를 찾아내, 3시간짜리 투어 버스에 몸을 실었다.


백발의 (아마도) 미국인 노부부들이 버스에 빼곡했고, 맨 앞에 남은 딱 한자리가 내 자리였다. 나는 그 버스 내 유일한 혼자 온 사람, 20대, 동양인이었다. 호기심 어린 눈초리가 쏟아졌다. 어느 노부부는 참지 못하고 너는 일본인이냐고('너는 오코요코 부족이니?' 라는 느낌의) 질문을 해 왔다. 당시만 해도 South Korea라고 답해도 노부부가 그게 어느 나라냐고 되묻는 때였다 (B.C 지성팍, 싸이). 나는 영어로 문답이 계속 오가는 게 두려워 나중에는 그냥 일본인이라고 했다. 노부부들의 표정이 납득이 간다는 편안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0-;


우산을 쓸 수도 안 쓸 수도 없는 옅은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 때는 잘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야말로 영국 성지순례를 하는 날의 배경으로 적절한 무드였다. 버스는 우리를 싣고 느릿느릿 리버풀 구석구석을 누볐다. 멤버들이 태어난 집, 학교, 걸어다니던 거리, Penny Lane, Strawberry fields forever의 배경이 된 밭 등을 지났다. 버스 안에서는 Beatles의 노래들이 흘러나왔고, 그들이 빛나는 시절에 인생의 빛나는 시기를 보냈을 노부부들이 행복한 미소로 노래를 따라 불렀다.


버스는 Beatles가 데뷔 전 공연을 했다는 클럽에 모두를 내려주었다. 이 곳에서 맥주 한 잔 하는 것이 투어의 대미였다. 지금은 일년 내내 비틀즈 카피밴드들이 공연을 한다고 했는데, 그 날 역시 실력이 좋은 어느 밴드가 차세대 비틀즈를 꿈꾸며 열연하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때쯤 개봉해 (나에게만) 인기를 끌었던 Across the Universe의 첫 장면(Hole me tight이 흘러 나오는)도 이 클럽에서 촬영한 것이었다.


런던에 돌아가는 기차 시간이 가까워져 클럽을 나섰다. 지하 계단을 오르는 동안 처음에는 기타 소리가 안 들리고, 보컬 목소리가 작아지더니 곧 베이스가 저 멀리 들리다가 드럼 소리마저 안 들리게 되었다. 밖에 나와 보니 비가 내린 뒤라 일찍부터 어둑해지고 있었다.


기차역 가까이 오니 리버풀 역에 내렸을 때는 보지 못했던, '존 레논 공항1)' 방향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아, 브릿팝의 시작과 끝은 존레논이었구나. 나만 몰랐지, 많은 사람들이 존레논 공항으로 들어와 존레논 공항으로 빠져 나갔구나.


유튜브가 없던 시절, 지구 반바퀴 반대편에서 CD플레이어에서 흘러나오는 락앤롤 사운드를 듣고 물어 물어 찾아온 브릿팝의 심장에 비틀즈가 있었다. 당시 나는, 무계획으로 온 지순례라 핫한 밴드들의 라이브 공연 하나 보지 못하고 돌아갔지만 사실 Beatles를 알현하는 것으로 할 일은 다한 것이었다. 아무 계획 없이 오더라도 온 도시가 Beatles를 소개하고 있었고, Beatles가 브릿팝이고 브릿팝이 Beatles라는 것이 이 도시가 내게 던지는 메시지였다.


1) 이 공항은 원래 다른 이름이 있었지만 2002년 리버풀 존레논 공항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국내선만 취항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스페인과 이태리, 독일 넘어 러시아까지 아우르는 국제 공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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