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딸딸한 평원과 통조림의 만찬

8일차, 에스떼야에서 로스아르코스

by 걷는수달


아침 7시, 아직 도시는 컴컴하고 새벽의 공기는 선선하다. 스페인은 해가 조금 늦게 뜨는 것 같다. 별(에스떼야)이라는 도시 이름처럼 밤하늘에는 별빛이 총총하다. 아침에 이런 저런 잡다한 짐들을 조금 버리고 나오니 배낭도 발걸음도 가벼운 기분. 차가운 공기를 마시며 발걸음으로 성큼성큼 어둠을 가른다. 오늘 하루와 아침해와 발걸음이 함께 시작하는 듯한 느낌이다.



오늘의 목적지는 로스아르코스. 약 22km의 여정이다. 가는 길에는 그 유명한 와인의 샘이 있다. 오래전부터 보데가스 이라체라는 와인업체에서 순례자들을 위해 운영하는 곳이라고 하는데, 수도꼭지에서 물대신 기적처럼 와인이 나온다. 원하는 만큼 마시거나 가져갈 수 있다고 한다.


출발 후 약 한시간 쯤 지나니 예고 표지판이 나오고, 곧 그 와인 수도꼭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했었는데 상상보다 모던한 모습이었다. 순례자 장식이 있는 스테인레스 수도꼭지가 두 개 있어서 왼쪽에는 와인 오른쪽에는 물이 나온다. 한모금 맛보고 가지고 온 작은 페트병에 1/3정도 담아서 가방에 넣었다. 아무리 술을 좋아하지만 8시부터 술이 받지는 않는군. 그래도 와인이 나오는 샘이라니 지금이순간 마법같다.



오늘의 풍경은 약간 황량한 듯 하면서도 아름다웠는데, 주로 밀밭이랑 평원길이 이어지는 가운데 멀리 멋진 스페인 스타일 울산바위 절경도 있고 언덕과 마을도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굉장히 예쁜 길이다. 중간중간 마주치는 작은 예배당도 평화롭다.



10시가 지난 시각 햇빛은 어느새 쨍쨍하다. 뷰가 근사하지만 그늘이 없는 벌판을 한참 지나가게 되었다. 아 혹시... 지금인가? 아까 담아온 와인을 꺼내서 홀짝홀짝 마시면서 걸었다. 한참 달궈진 김에 술이 들어오니 금방 알딸딸해지는 것 같다. 하지만 생각보다 좋군. 훌륭해. 걸으면서 와인은 생각해보지 못한 조합이었는데 내가 상상력이 모자랐다. 반성해야겠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길을 걷는 한국인 모녀분이 나를 추월해 가셨는데 다행히 다 마시고 빈병을 가방 사이드에 넣어둔 후였다. 휴 술주정뱅이 모습은 보이지 않을 수 있었다.


1시가 채 안되어 로스 아르코스에 도착했다. 숙소에 체크인하고 나와보니 로스 아르코스는 정말 작은 마을이었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식당도 가게들도 문을 거의 닫은 듯 했다. 식사 해결하는게 쉬워보이지가 않는다. 일요일에는 이런 문제점이 생길 수 있는 거로군. 마침 숙소에서 어제 에스떼야에서 만났던 산드라 리차드를 다시 만났다. 그들도 식당도 없고 해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중이었다. 알베르게 부엌은 쓸만한 것 같고 저기 작은 가게 하나 있던데 거기서 가서 뭐라도 사서 해먹어볼까?


알고보니 산드라는 매우 추진력과 리더십이 있는 누님이었다. 함께 구멍가게에 가서는, 신선식품은 거의 없었지만 이정도면 충분해 하고 토마토 통조림, 올리브 통조림, 싸구려 햄 등등을 같이 사왔다. 그리고는 차마 쓰자고 할 수 없었던 부엌에 있던 더러운 오일을 과감히 넣더니 토마토 소스와 소세지, 콩 등을 볶아 일종의 덮밥소스를 만들기 시작했다.


산드라 근데 어제 채식주의자라고 한거 같은데 이거 쏘세지 괜찮아요? 라고 물었지만 흔쾌히 오케이. 어우야 호방하다. 나도 열심히 주방에 있던 마늘도 썰어 넣고 (한국인답게 왕창) 쏘세지도 열심히 자르고 볶아대면서 도왔다.

그러는 동안 저쪽에서는 주방에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쌀로 밥도 짓고 있었다. 냄비에 물을 왕창 넣고 쌀을 넣어 한참을 끓이더니, 물을 빼고 밥만 건져내는 생전 처음 보는 근본 없는 방식이었지만 차마 밥은 그렇게 짓는 것이 아니야 라고 할 수 없었다. 나름대로 사이드로 토마토 참치 샐러드도 함께하여 식사 준비 완료. 와인도 곁들이니 꽤 그럴싸했다.


마커스 도미닉 등 산드라 패밀리(?)의 다른 일행들하고, 숙소 1층에서 만난 한국인분도 모셔와 한 여서 일곱명이 함께 식사를 했다. 시장이 반찬이고 같이 먹으면 맛있다고, 레시피도 없이 되는대로 만든 음식이지만 정말로 맛있었다. 다만 마늘은 한국 기준으로는 많이 안넣었지만 여기 마늘향이 쎄네.



시설은 다소 꼬질했지만 아주 멋진 음악이 흘러나오고 고요한 낭만이 있었던 로스아르코스의 숙소에서 또 하루가 지나갔다.


9월 25일 일요일 로스아르코스

오늘 걸은 길 약 22km

남은 길 약 650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