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의 일출과 함께 걸은 길
9일차, 로스아르코스에서 로그로뇨
카미노 아침의 멋진점 중 하나는 시간의 흐름을 너무나 선명하게 느낄수 있다는 것이다.
계절마다 다르겠으나 지금은 보통 아침 7시쯤 출발하면 깜깜하고 춥고 하늘의 별빛을 보면서 걷기 시작한다. 조금 지나 7시반에서 8시 사이가 되면 동이 트기 시작하는데 아주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하여 오늘처럼 탁트인 벌판에 있을때는 저멀리 지평선에서 해가 뜨는걸 볼 수 있다.
깜깜한 길에서는 썰렁하니 혼자 외롭고 무서웠는데 점차 밝아지면서 추위도 조금씩 사그라든다. 조금씩 환해지면서 앞뒤에 사람들이 걷고 있는 것도 보인다. 사실 보이지 않았을 뿐이지 계속 앞뒤로 있었을터다. 저 멀리 사람들이 있다는것, 그리고 내 뒤에 따라오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때마다 매번 안도감이 든다. 내가 길을 잘못든게 아니고 같은 길을 걷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 참 다행스럽다.
그렇게 한두시간 걷다가 대개 처음 만나는 바에서 커피 한잔에 크로와상이나 빵같은걸로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하는데, 그제서야 몸이 좀 풀리면서 본격적으로 걸을 준비가 된다.
로르카 에스떼야에서 휴식을 좀 취한뒤로 컨디션이 올라왔는지 어제 오늘 걷는 길은 나름대로 가뿐했다. 오늘은 순례길을 걸으며 처음으로 이어폰으로 노래를 들으며 걸었다. 어제 로스아르코스의 알베르게에서 틀어준 음악이 꽤 좋아서 사운드하운드에서 검색해서 알아놓았는데, 그 음악도 듣고 원래 좋아하던 지오디의 길이라든지 (산티아고 길이니까) 닐다이아몬드의 셉템버몬이라든지 (9월 아침이니까) 여러가지 음악을 하염없이 들으며 걸었다. 혼자 심취해서 립씽크하면서 걸으니 발걸음도 가볍네.
잠시 음악에 빠져있다가, 비아나에서부터는 어제 만난 마커스랑 마주쳐서 간단히 점심먹고 이런저런 얘기도 나누며 오다가, 로그로뇨 거의 다 와서는 역시 어제 같이 저녁 먹었던 산드라 도미닉까지 만나져서 같이 쉼터에서 콜라도 사먹고 하며 걸어왔다. 저멀리 도시가 보이기 시작하면 이제 다온 것 같은데 싶으면서도 풍경도 별로인 도시 진입 길이 줄창 이어지며 약간은 애를 태우는데, 같이 걷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래도 조금 덜 지루하다.
로스아르코스의 알베르게에서 발견한 곡은 치치 페랄타 Chichi Peralta라는 가수의 A pesar de usted 라는 곡이다. 산티아고 길을 걸으며 들으면 정말 잘 어울린다. 이후에도 카미노 여정 내내 훌륭한 길동무가 되어 주었다.
오늘은 30키로가까이되는 먼 길이라, 나름대로 일찍인 7시에 출발했지만 로그로뇨에 도착하니 거의 4시 가까이 되었다. 중간중간 많이 쉬기는 했는데 그래도 무려 9시간 가까이 되는 그랜드 여정이다. 그동안 걸었던 것중 가장 긴 거리였네.
로그로뇨는 나름 대도시답게 중국 마트가 있었다. 중국 마트에서는 보통 한국 라면도 함께 판다고 들었다. 숙소 체크인하구 바로 달려가서 라면을 사다가 당장 끓여먹었다. 마침 호스텔에 누군가 남겨놓은 젓가락 한짝이 있었는데 어찌나 반갑던지. 오랜만에 뜨겁고 매운 국물이 들어가니 속이 좀 풀리는것 같다. 서양 사람들은 날씨도 추워지는데 왜일케 미지근하게 먹는거야!
라면을 순삭한 뒤에는 에스떼야 전에 같이 걸었던 아눈이랑 채리사가 연락해줘서 핀초스 거리에 가서 유명하다는 버섯핀초스랑 감자핀초스며 깔라마리 등 여러가지를 먹고 왔다.
나는 내일 여기서 하루 쉬어가는데 그동안 길에서 만난 친구들이 대부분 나보다 앞서서 걸어가고 있다. 언젠가 한번 각잡고 추월하면서 눈물의 상봉을 해야겠구만. 만나고 헤어지고 또 만나는게 길이지만, 문득 초반에 같이 걸었던 안드레아랑 안톤아저씨 내외가 보고싶어지는 밤이었다.
9월 26일 월요일 로그로뇨
오늘 걸은 길 약 29km
남은 길 약 620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