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로뇨에서 국밥을 추구해도 괜찮은걸까?

10일차, 로그로뇨

by 걷는수달


외국에 나올때면 한식 그렇게 찾지도 않고, 김치 없이도 잘만 다니고는 했는데 이제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뜨끈한게 자꾸 땡긴다.

애초에 유럽의 지금 날씨는 그늘에 있으면 꽤 선선한데, 썰렁한 바람을 맞으며 바의 야외자리에서 맥주나 와인이랑 딱딱한 샌드위치를 먹는경우가 많다 보니 이거 뼛속에 바람이 들 것같은 기분이 종종 들고있었다.


더불어 유럽인들의 음식을 먹는 온도는 우리보다 상당히 낮은지, 더운 음식도 뭐랄까 뜨겁게는 안나오고 따뜻하게만 나와서 채워지지 않는 온도감의 아쉬움과 허기가 계속해서 있다. 그래서 오늘은 로그로뇨에서 하루 쉬는 김에 알베르게 부엌에서 한번 뜨끈하게 해먹기로 했다.


먼저 브런치. 근처 까르푸에서 양파(스페인식 양파 같은데 줄기는 파이고 뿌리는 양파인 듯한 완벽한 이도류 야채였다!) 야채 계란 햄 즉석밥 등을 사왔다. 계란볶음밥을 호다닥 만들고 어제 중국마트에서 사놓은 너구리를 파를 듬뿍 넣어 끓였다. 그리고 양상추 햄 오일 간장으로 간단한 샐러드도 곁들였다. 순식간에 3코스 완벽 세트 완성. 그리고 식기 전에 + 동시에 세가지 음식을 흡입했다. 역시 뜨거울때 후루룩 빨리먹는 이맛, 그리고 심금을 울리는 간장 맛까지 그동안의 아쉬움을 좀 채워주는 맛이다.



두번째로는 절대 하면 안되는 멍충한 짓을 결심했는데, 보온병을 사기로 했다. 오전에 걷다보면 한기가 느껴질 때가 있는데 뜨거운 물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엊그제 몇백그람 줄였다고 뿌듯해한건 어느새 까먹었나보다. 두어군데 스포츠샵에서 보온병 발견을 실패한 뒤, 어제 지나가다 본 스페인식 다이소같은곳에 혹시 있나 하고 봤더니...



두둥! 앵무새가 그려진 아스트랄한 분홍뚜껑의 보온병이 있었다. 심지어 용량이 900미리...

100그람 무게도 늘리기 아쉬운 순례자가 절대 사면 안되는거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나는 사실 아직 한번도 안쓴 티타늄컵에 따뜻한 물을 받고 향긋한 티백을 넣은뒤 카미노의 적막한 평야의 어디에 주저앉아서 그윽히 차를 즐기는 로망에 유혹되어버린 것이었다.


그렇게 과연 배낭 옆주머니에 들어는 가려나 싶은 왕큰 앵무새 보온병과, 은근히 쓸 일이 많은데 반짓고리의 초미니가위는 너무 안들어 쓸데마다 화를 나게해서 새 가위까지 1유로샵에서 사버린 나는 엊그제 고심하고 버리며 줄인 무게를 가볍게 원복시키는데 성공했다. 이것이 요요현상인가?



그리고 대망의 피날레. 빨래를 하러 다녀오는길에 마트에서 쇠고기를 200그람정도 사서, 아까 산 야채를 많이 때려넣고, 어제 산 중국 진간장과 (맛없다) 아까 까르푸서 또 산 기코만 왜간장과, 숙소에 있는 칠리파우더랑 소금을 이용해서 원래 의도는 육개장 비슷한거였으나 결과물은 뭔지 알수없는 국밥을 끓여먹었다. 요리에 너무 집중한걸까 고기도 안찍고 접시도 안찍어서 냄비샷밖에 없네 쩝. 다음엔 열심히 찍어야지.


맛은... 뭐 먹을수는 있는 맛이었다. 일단 고기가 있고, 맵고 짠 맛이 다 있고, 온도감이 뜨거운 것으로도 만족. 하지만 국물의 베이스가 아쉬워서 담에는 양파를 볶는다든지 마늘이라든지 치킨스톡 라면스프 등의 잔기술을 더해야겠다는 반성을 했다.



그리고 나서 생장서 사서 들고다닌 얼마 안남은 미니 칠리머스터드 소스와, 한국서부터 소듕히 가져와 간직했지만 배낭에 가지고 다니면서 부서져버린 비빔면과 (스프는 보존했다) 과감한 작별을 고했다. 배낭에 시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인데 왜냐면...



내내 좀 아쉬웠던 바로 그맛...

기코만 250미리 간장맛을 보니 한번 들고 다녀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ㅋㅋㅋ 지금 아직 한번도 안쓴 라면스프도 있으니 이 원투펀치로 이제 알베르게 취사는 웅장해지지 않을까?

배낭무게도 웅장해지겠지만...?!


순례길 중 처음으로 하루를 통째로 쉬어갔던 로그로뇨에서의 오늘 난 그렇게 국밥과 여러가지 로망과 배낭 짐 구성 개선에 (과연 개선이었나) 종일 집착하고 있었다. 그러다 초저녁께에는 성당도 둘러보고 도시도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우연히 만난 마커스와 그의 사제 친구랑 또 핀쵸스랑 와인도 한잔 하고 하면서 하루가 저물어갔다.


2022년 9월 27일 화요일 로그로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