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흐린 날 흐린 길

12일차, 나헤라에서 산토도밍고

by 걷는수달


카미노의 아침은 자의반 타의반 6시가 안되어 시작하게 된다.


순례자들마다 자신의 리듬이 있어 출발하는 시간은 각자 다른데 그 중에서도 아침 일찍 출발하는 분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 분들은 5시 쯤 일어나서 씻고 짐 챙기고 간단히 요기하고 6시 전에 길을 떠난다. 공동으로 사용하는 도미토리 숙소에 있다 보니 일찍 일어나시는 분들이 아무리 조용 조용 조심해서 준비하더라도 아무래도 부스럭부스럭 짐 챙기고 화장실 다녀오고 하는 소리가 들리게 마련이다. 그래서 보통은 아침일찍파(?)들이 준비하시는 소리에 잠을 깨게 되는데 그 시간이 대개 6시 이전이다. 나는 6시 30분 출발을 목표로 하고 있기에 그렇게 적당한 시간에 자연스럽게 일어나게 되는게 나쁘지 않다.


어제 머무른 나헤라의 공립알베르게는 강당같은 큰 공간에 2층 침대들이 벽마다 배치되어 있는 구조에 환기도 잘 안되는지 공기가 매우 퀴퀴 꾸리함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아늑했다. 20명이 넘는 사람이 있었던 것 같은데 자는 동안 크게 코고는 소리가 들렸던 기억도 없다. (세상에 이게 가능하다니?) 밤에 자는데 꽤나 조용한 편이었고, 모처럼 고요하게 숙면을 하다가 잠깐 깨서 아직 이른 새벽인가 싶어 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이미 6시 반이었다. 게다가 대부분 아직도 자고 있었고 여전히 고요했다. 서양 친구들이 어제 밤늦게까지 파스타만들어먹고 놀고 하더니 다들 기절한걸까. 이런 고요한 6시반은 처음이었다. 나랑 비슷한 시간에 부스스 일어난 순례자들도 있었는데 다들 시계를 보고 살짝 놀라고 있는 느낌.


일어나서 씻고 짐 정리하고 출발하니 이미 7시반이 훌쩍 넘은시간. 출발부터 계획대로 안되는군. 그래도 첫 바에서 아침식사는 건너뛸 수 없지. 바에서 콘레체와 초콜렛빵으로 아침을 먹고 나와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데 뒤에서 마커스가 걸어오는게 보였다.


헤이 마커스 안녕? 너는 이시간대에 걷는구나. 마커스 만난 김에 커피를 한잔 더 마시며 얘기하다 보니 나는 보통 7시 이전 어두울 때 출발하는걸 선호하고 마커스는 해가 떠서 조금 밝을 때 출발하는게 좋다고 한다. 어두워서 아무 풍경도 안보이는 길은 싫다고. 나는 어스름에 출발해서 뒤에서 뜨는 일출과 시간의 흐름을 바라보는 것과 일정이 조금 여유로운게 좋다. 너와 나는 한시간 정도의 차이가 있군. 오늘은 불의의 숙면으로 인해 좀 늦게 나왔더니 이렇게 마주칠 수 있었네.


사람마다 자신만의 리듬이 있고, 각자 자신의 리듬을 유지하되 마주치는 다른 친구들의 리듬도 훌훌 존중하는게 카미노의 미덕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추가로 가져온 커피 한 잔을 다 마시고 일어나려는데, 마커스는 또 뒤에 걸어오는 다른 친구를 보더니 자기도 한잔 더 마시고 출발한다고 먼저 가라고 한다. 그려 씨유 온더 로드.



푸엔테라레이나를 떠나는 아침 처음 만나서 사진을 찍어드린, 수레를 끄는 노부부는 그 뒤에도 길에서 종종 마주치고 있다. 가끔은 인사하고 지나가기도 하고, 가끔은 저기 멀리 보일 때도 있다. 올라 부엔까미노! 하고 인사하면 오 포토그래퍼! 하고 반겨준다. 나는 사진가가 아니지만 사진 몇 장 찍어드린 이후로는 호칭이 되어버렸다.

그분들은 영어를 못하고 나는 스페인어를 못하기 때문에 인사하고 웃고 눈인사를 나누고 나면 딱히 할 수 있는 건 없다. 그래도 마주치다보니 괜시리 계속 반갑다.



오늘은 날씨가 좀 흐리면서 종일 바람이 많이 불고 있었다. 나헤라에서 출발하면 보통 가게 다음 다음 도시는 산토도밍고다. 약 21킬로정도의 거리로 살짝 더 걷고 싶은 아쉬운 느낌인데, 원래는 산토도밍고를 통과하여 다음 마을이나 다다음 마을까지 좀더 갈 계획이었다. 하지만 어제 처음으로 생긴 물집은 계속 신경쓰였고 오후가 되자 걷는 중 처음으로 본격적인 비도 내리기 시작했다.


이건 여기서 멈추라는 계시구만. 산토도밍고에서 묵어가기로 마음먹었다. 마을 도착 직전 자갈길에서는 특히 갑자기 비바람이 세게 내리쳤다. 저 앞에 스포츠 샌들을 신고 걷는 미국인 아주머니 아눈이 보였다. 헤이 킴 안녕? 우리는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 걸까? 비바람에 정신 없는 와중에 그러게 왜 우리는 이러고 있는걸까 되뇌이며 산토도밍고에 도착했다. 마을에 도착하고 나니 비가 좀 그쳤다.




도착한 산토도밍고 공립 알베르게는 건물이 크고 계단이 빙글빙글 이어져서 계단과 계단이 있는 난간을 따라 위층이 보이는 구조의 재미있는 건물이었다. 한국 단체 순례객들도 와 계시고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있었다. 내가 배정받은 방도 주로 한국 분들이 많으시다. 그동안 대부분 2층 침대를 많이 배정받았었는데 오늘은 오랜만에 다행히 1층 침대를 받았다. 조금 조심스러워 그랬나 숙소 사진은 왜이리 안찍었을까.


숙소 벽에 붙어있던 순례자 장비 가이드를 사진 번역을 돌려 보며 오늘의 일기는 마무리.

역시 짐은 더 가벼워야 하며 물집은 피할 수 없고 의외로 스웨터를 입었어야 하는지도?


9월 29일 목요일 산토도밍고

오늘 걸은 길 약 20km

남은 길 약 560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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