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넓은 포도밭 사이로

11일차, 로그로뇨에서 나헤라

by 걷는수달

어제 하루 잘 쉬었으니 며칠간 진득하게 걸어보자. 오늘의 코스는 나헤라까지 약 30킬로의 구간이다. 거리로는 엊그제 로스아르코스에서 로그로뇨까지 이상이 되겠다. 오늘도 아침 7시쯤 어둠녘에 출발하여 동이 트는걸 보면서 하루를 시작했다. 시내구간을 벗어나자 일종의 공원구간을 지났는데 청설모가 많이 보였다. 참 사람을 무서워하지도 않는구만.



론세스바예스부터 몸담았던(?) 나바라Navarra 주는 로스아르코스까지였고, 이제 로그로뇨부터는 행정구역이 바뀌어 리오하Rioja 주를 걷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어럽지않게 찾아볼 수 있는 유명한 "스페인 리오하 와인"의 그 리오하다. 그래서 그런가 나바라에서도 포도밭들이 꽤 있었지만 오늘의 길에는 훨씬 본격적으로 드넓은 포도밭이 펼쳐져 있었다.


이곳의 농장들은 스카이뷰로 농장 시뮬레이션 게임을 하듯 구획이 정확히 나눠진게 참 재미있다. 포도밭 올리브밭이 선명히 나눠보이고, 조금만 높은 언덕지대만 올라가도 드넓은 밭의 작물 분포(?)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키가 작은 포도밭과 실루엣이 동글동글한 올리브나무, 멀리 보이는 구릉지는 구획 파악에도 용이하지만 걷다 보면 마음을 참 편하게 해준다.


걷다 보니 지나가던 순례객이 포도 한꼭지를 나누어준다. 갈길이 멀기에 마침 반갑게 받아 먹으며 열심히 걸었다. 사서 준 포도일까 지나가다가 슬쩍 서리해서 준 포도일까?



그리고 어제 사버린 근심... 아, 아니지 카와이한 900ml 거대 핑크 앵무새 보온병은, 이제 무게에도 불구하고 산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매일 열심히 한번씩 따뜻한 차를 타 마셔야한다. 고액 연봉자를 고용한 회사의 마음이 이런걸까. 아침에 포트에 끓인 물을 부어왔는데 컵에 따르니 왠지 뜨겁지는 않고 따뜻한 것만 같아 성능이 좀 아쉬운 것도 같지만 기분탓이겠지.

그래도 바람부는 황량한 길에 잠시 철푸덕 앉아 뜨뜻하게 차 한잔 마시니 참 좋았다. 길위의 그윽한 로망이 있다.



2시 조금 넘어서 나헤라에 도착했다. 간만에 공립알베르게에 체크인했는데, 한국인분을 만나 함께 점심 먹을까 하고 찾아보다가 5시까지하는 고마운 식당을 발견했다. 보통 식당들의 점심 영업은 빠르면 1시반에도 끝나는데 5시까지 하시다니 슈퍼 감동이다. 여유로운 마음으로 인당 거금 18유로에 3코스 선택할 수 있는 메뉴 델 디아(오늘의 메뉴)를 푸짐하게 먹기로 했다.


오늘 갔던 식당은 구글평점도 좋고 음식도 아주 맛있었다. 메인을 여러가지 중 고를 수 있길래 도전정신을 가지고 Pork cheek을 선택할라 그랬는데 주문 받는 분이 그거 말고 스테이크를 먹으라고 하셔서 그냥 말 잘 들었다. (어이 애송이 볼살은 아직이라구) 로컬 전문가의 추천과 만류는 참을 수 없지. 여기서 종종 돼지뽈살요리가 눈에 띄는데 뭔지 궁금하다. 다음에는 꼭 먹어봐야겠다. 아, 메뉴판도 찍어둘걸! 성실하지 못한 사진촬영 자세에 안타까운 요즘이다.


요즘 많이 걸으면서 느끼는건데 뭐랄까 계속 많이 먹어도 배고프고 목마르다. 하루에 네 끼 정도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그런가 밥먹으면서 먼저 주문하는 음료는 비노(와인)와 맥주를 둘 다 시켜버렸다.



숙소에 돌아와서는 마트에서 장을 간단히 봐 와서 여기 계시는 한국분들과 이것저것 차려서 점심먹은지 3시간만에 또 저녁을 먹었는데, 시금치 조개국(!)을 한번 끓여보았다. 시금치는 마트에 많으니 한봉지 사고, 조개 통조림이 있길래 넣어서 같이 끓여봤는데 결과물이 꽤나 그럴싸했다. 다음 요리 시간에도 응용할만한 훌륭한 녀석이다. 재료와 조개캔 사진은 또 안찍었네.



그렇게 저녁까지 엄청 먹고, 숙소 책장에 꽂혀져 있는 한글 성경책을 보며 홀리한 카미노 길을 신심으로 왔지만 무거운 성경책을 그만 두고 가버릴 수밖에 없었던 누군가의 마음도 한번 헤아려보고 하면서 오늘이 또 지났다.


9월 28일 수요일 나헤라

오늘 걸은 길 약 30km

남은 길 약 580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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