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량이지만 재활중입니다

24~25일차, 레온

by 걷는수달


레온에서 총 4일을 보냈다.

왼쪽 다리 근육의 경직은 거의 풀렸고, 발의 물집도 다 나아서 이제 제법 견고한 굳은살이 되었다. 아마 같은 자리에 물집은 더이상 안생기겠지.


첫날에는 사하군에서 아침 기차로 도착해 론세스바예스에서 같이 출발한 동기같은 머레이와 채리사를 오랜만에 반갑게 만나서 인사를 나누었다.


둘째날에는 공쌤을 찾아가 부항도 뜨고 혼도 좀 나면서 대낮부터 삼겹살에 와인을 잔뜩 먹고 나서는, 저녁에는 레온 도착한 마커스 산드라 도미닉이랑 만나서 회포도 풀었다. 연 이틀 술을 왕창 마셨네 그려.


산드라 패밀리 중 한명인 도미닉은 벨기에에서 왔는데 뭐랄까 내가 가져보지 못한 '멋지게 늙은 유머러스한 삼촌' 같은 사람이다. (한국에 유쾌한 삼촌은 있는데 나랑 나이 차이가 9살밖에 안나서 늙음 수치가 떨어진다) 만나고 헤어질 때면 엄청 오래 꼭 안아주는 파워 허그를 해 주는데 좀 부담스러우면서도 기분이 따스하다. 언젠가 동키 보내고 걷는 날 도미닉을 마주쳤는데 오우 킴 맙소사 짐을 보내다니 하는 반응을 보여 난 그 뒤로 왠지 짐을 잘 안보내게 되었지. 가상의 삼촌은 발이 아프게 된 원인을 쪼금 제공하기도 했군.


암튼 도미닉은 음식이 맛있으면 손 제스처도 하면서 호들갑을 떠는 다분히 미식가스러운 사람이었는데, 그가 찾았다는 레온 최고의 식당에 다같이 저녁을 먹으러 갔다. 가고 보니 그 식당은 바로 첫째날 채리사 머레이랑 우연히 가서 멈 샴페인을 먹은 그곳이었다. 호텔과 함께 운영하는 고오급 식당이었지.

각자 고른 메뉴 중 단연 내 왼쪽에 앉은 브랜든 아저씨가 시킨 왕갈비가 모두의 부러움을 샀다. 비주얼부터 너무 끝내줬다. 메뉴명이 뭐였을까... 혹시 언젠가 레온에 또 가게 되면 꼭 사먹어야지.



셋째날에는 카미노 베프 마커스랑 빨래도 하구 도시 슬슬 걸어다니며 같이 대성당 구경도 했다. 이제 마커스랑은 같이 다녀도 자연스레 편하다. 성당은 외관은 멋졌지만 내부는 잠겨 있는 챔버도 많고 그냥 그랬다. (스테인드 글라스는 멋졌다) 부르고스에서 출발해 레온이 마지막 여정이었던 영국 요크 출신의 시크한 배리 아저씨도 중간중간 계속 마주쳤다. 어쩌다보니 배리아저씨랑은 산볼에서도 만나고, 그의 여정 내내 거의 매일 마주치게 되었다.


아마도(가 아니라 확실히) 내가 배리아저씨의 이번 카미노에서 가장 자주 마주친 사람일 수도 있겠다. 출발 전날 부터 마지막 날까지 하루가 멀다하고 동선이 겹쳤으니 말이다. 인연은 참 그렇게 랜덤하다.

마커스랑 제니랑 저녁을 먹고 나왔을때, 배리 아저씨는 마침 또 바로 앞에 있는 아이리시 펍에서 맥주 한잔을 하고 계셨는데 정말 인연인 것 같아서 같이 사진도 찍었다.



처음 2일은 코벤트가든 호스텔에서 머물렀고, 후반 2일은 멀지 않은 위치의 호텔 라 폰사다 레지나에서 머물렀다. 이 호텔은 참 재미있다. 나무 계단이 하도 오래되서 닳아있고 자물쇠는 구식 열쇠로 돌려야하는 낡은 호텔인데 위치는 도심 한복판에 있다. 클래식한 로망이랄까? 손때묻은 호텔 벽이며 기둥이며 방안의 가구들이 얼마나 오래되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계단은 삐뚤빼뚤한데 삐걱삐걱 정겹다. 더불어 화장실에 욕조가 있어서 여행의 피로를 풀기에는 매우 훌륭! 사실 생각해보니 처음 이삼일을 호텔에서 묵고 나중에 호스텔로 옮기는 게 맞았을 것 같지만 뭐 여행이라는 건 그렇게 흘러가는 거니까.



마지막 날인 오늘은 스페인의 국경일이었는데 히스패닉데이라고 콜럼버스가 신대륙 어딘가를 발견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라고 한다.

늦으막히 일어나서 호텔 조식 먹고 슬슬 거리로 나왔다가, 요즘 자주 보는 예가가 지나가길래 인사하고 잠시 이야기를 해 보니 휴일이지만 인도 음식점은 오늘 문을 연다는 소식이다. 일단 쭝국인 마트에서 짜파게티랑 너구리도 사고, 고 옆의 성당도 잠깐 구경하고, 문열었다는 김에 계획에도 없던 인도식 점심도 왕창 먹었다.



레온의 중심 거리와 골목들은 이제 꽤나 익숙해졌다. 레온 메인 스트리트의 중심 거리는 딱 하나로 길게 이어져 있어서 지나다 보면 길에서 마주쳤던 순례자들을 엄청 많이 마주치게 된다. 아마도 로그로뇨 즈음에서 마주쳤던 이선생님도 다시 뵈어 레온 성당 앞에서 사진도 찍어드렸고, (이때까지는 성함도 몰랐다) 메세타에서 뵈었던 대구 남매분들도 자주 마주쳤다.


대구 남매분들은 유심칩인가 문제가 있어서 예정보다 많이 레온에 머물고 계신다고 한다. 민망하게도 내가 길거리를 어슬렁대거나 테라스에서 술한잔 하고 있는 타이밍에 곧잘 마주쳤다. 그분들에게 나는 야매 한량 순례자 컨셉이 되어 버린 것 같다. (근데 생각해보니 레온 거리에서는 늘 어슬렁대거나 먹거나 마시거나 하고 있었던 듯도)



스페인 낮잠은 그렇게 꿀일수가 없다.

점심먹고 호텔에 잠시 들어와 창문을 열고 누워있으니 창밖으로 시원한 바람과 사람들 웅성거리는 거리의 소음이 들리는데 너무나 편한하고 자연스럽게 단잠에 빠지게 된다. 역시 신토불이인가. 스페인의 오후 낮잠 문화가 괜히 생긴게 아닌가보다. 현지에서는 현지 문화대로 살아야 하는듯.


그렇게 단잠을 자다 일어나서 4일동안 수없이 지나갔던 레온 성당과 분수대, 가우디 건물앞을 다시 한번 구경하고, 이제는 제법 길을 찾을 수 있을것 같은 골목길도 한번 둘러본 뒤 호텔로 돌아왔다. 새삼 방안이 적막하다.


내일부터는 또 길을 나서야겠지?


이제 몸은 거의 다 나았지만 기차의 달콤함과 도시의 안락함에 이미 빠져버린 이상 선뜻 발길이 떼어 질라나 모르겠다. 뭐 내일 아침에 상황 봐서 버스나 기차로 아스토르가로 바로 가서 하루정도 더 쉴 의향도 있다. (이제 고삐풀린 자본주의 아재를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어!)


내 계획을 너무 밀어붙이지 않고 스스로에게 적당한 유연함과 여유를 주는 것. 잘 먹고 물 잘 마시고 사용한 근육을 스트레칭 자주 하는 것. 다른 이들을 보고 숨차게 따라가지 않기.

공쌤 말마따나 뱁새가 황새 따라가려고 하지 말고 언제나 마이 페이스를 지키며 몸을 100만큼 썼으면 스트레칭을 그만큼 해주기. 발목과 골반과 목을 일자로 만들고 기분 좋게 걸을 수 있을 만큼만 걷기.


4일간의 재활(?)동안 아주 몰랐던 것을 배운건 아니지만 어느샌가 조금씩 틀어지며 잠시 산으로 갔던 배를 다시 강으로 가지고 내려왔다. 우박사와 공쌤에게 혼난 덕인가.


이제 굳은살이 생길곳은 다 생겼으며 어떻게 걷고 쉬어야 하는지도 조금 더 잘 안다. 아마도 더 잘 걸을 수 있을거다. 하지만 함부로 예상하고 진취적인 계획은 세우지 말아야지. 그리고 혹시 즐겁게 멀리 가게 되는 날에는 그날의 좋은 컨디션과 환경에 감사하면서 또 열심히 계란과 빠나나를 먹고 스트레칭을 해야겠다.


맨날 콤퓨타 앞에서 골치 아픈거에 머리 싸매고 풀리지 않는 인생 과제에 허덕이던 나에게도, 비슷한 마음의 재활을 해주어야겠다.

뭐 지금 하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10월 12일 수요일 레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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