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미노 카페 단톡방에서 레온에 한의사 선생님이 계시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왼쪽 발목과 종아리 통증이 여전했기에 오늘은 쉬면서 한번 찾아가 보기로 했다. 단톡방에 카톡 ID도 있길래 아침에 연락 드려 보니 11시 쯤 오라고 하면서 명함 사진을 보내주신다. 공선생님이구나.
지도에서 주소를 검색해 보니 시내에서 3,4킬로미터 정도의 거리. 평소 같으면 가볍게 걸어갈 거리이지만 급작스레 워킹파워를 잃은 나에게는 부산만큼 먼 거리였다. 시내에서 택시를 타고 찾아갔다.
10시 반쯤 찾아간 그곳은 한적한 주택가의 조용한 건물이었다. 현관에서 호수를 눌렀더니 공동 현관문이 열렸다. 사무실인 듯 주택인 듯 낯선 구조의 건물. 썰렁한 1층 로비를 지나 2층으로 찾아 올라가 문을 두드렸다. 선생님이 문을 열어주시는데 혼자 운영하시나 보다. 옛날 한의원 분위기가 나는 진료실 침대에 누웠다.
선생님은 이리저리 만져도 보고 굽혔다 폈다도 해보라고 하더니 피로 누적에 의한 근육통이라고, 대체 여기 오는 한국 사람들은 왜 이리 무리해서 아파가면서 걷느냐고 타박을 좀 하셨다. 사실 저는 남들보다 한 이틀정도 여유롭게 걸었는데 그래도 결국 아프던데요 라고 하고 싶었지만 왠지 그건 그것대로 좀 창피해서 일단 그냥 끄덕끄덕 했다.
공쌤은 치료를 하시기 보다 뭐랄까 한참 혼을 좀 내는 느낌이다. 요약해 보면 이렇다. 이정도 오래 걷는 순례길은 계속해서 몸에 부하가 쌓인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적절한 자세와 규칙적인 휴식을 신경써라. 아마 어느 순간 신경쓰는게 무뎌지고 조금씩 무리했을 거다. 그리고 매우 적극적으로 스트레칭하고 물하고 단백질 잘 챙겨먹어라. 아침에는 빵 사먹지 말고 달걀이 들어간 토르티야를 사먹어라.
움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설득력이 있군. 그러고 보니 맥주는 열심히 사마셨지만 물은 열심히 챙겨먹지 않은 것 같기도?
사실 그것보다 더 핵심적인 것은 욕심 내면서 걷지 말라는 이야기였다. 목표 일정에 고집 피우지말고 너무 자기 중심적이지 말라는 이야기. 왜 머나먼 여기까지 와서 스스로 스트레스를 짊어지고 힘들어 하면서들 그렇게 걸어가냐고. 남들과 비교하고 따라가려고 하지 말고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만 가라는 말이다. 듣다 보니 맞는 얘기구먼요. 나도 이제 이 길이 무슨 길인지 잘 모르겠심더.
레온의 공쌤은 사실 한의사는 아닌데, 90년대 초반에 스페인으로 오셨다고 한다. 처음엔 태권도 도장 사범님으로 오셨다가 이후에 카이로프락틱이랑 대체의학 계열로 장르(?)를 바꾸셨단다. 뭔가 근육질의 쿨한 중년 형님 같기도 하고 고독한 늑대 느낌이기도 한 분이셨다. 스페인에 오래 사셔서 그런가 왠지 스패니시스런 빠른 말투가 공쌤의 차밍포인트.
오랜 잔소리와 함께 콕콕콕 바늘기계로 아픈 부위를 찔러 부항을 떴다. 피도 여러차례 뽑아내며 근육도 좀 풀고, 스트레칭도 하면서 전반적으로 꽤 다리 근육이 풀린 것도 같다.
치료가 끝나고 어때 밥 먹고 갈 생각 있냐며, 한국인은 삼겹살을 먹어야 힘이 난다고 함께 장을 보러 마트로 향했다. 마트까지는 거리가 꽤 되었는데 다리 테스트도 할 겸 걸어가자고 하신다. 가는 길에 벌써 좀 부드럽고 잘 걸어지지 않냐고 하시는데 글쎄요 아직 아픈 것 같기도 하고 조금 나은 것 같기도 하고 잘은 모르겠다. 근데 공쌤의 발걸음이 왠지 신나보이는데 선생님 환자가 아니라 삼겹살 친구를 기다리신 거였나요? 어쨌든 그라시아스입니다만.
마트서 삼겹살이랑 야채 등등을 사와서는 진료실 옆방 공쌤 거실에서 지글지글 구워 먹었다. 직접 담근 김치랑 밥도 꺼내주시네. 오랜만에 삼겹살에 쌈장이랑 싸먹으니 진짜 기운이 나는것 같은 맛이다.
그러고보니 전에 중국 여행할 때도 운남성 샹그리아 자희랑 호스텔에서 주인장 행님이랑 삼겹살 먹고 술마시고 고스톱 치면서 뭔가 기력을 회복했었던것도 같은데. (그형님 보고싶네) 역시 한국인은 삼겹살인가보다. 엄청시리 많이먹었다. 한 4인분은 먹은것 같다. 선생님네 거실에서 러시아 아재가 요리하는 유튜브를 틀어놓고는 같이 와인 두병을 비우고, 80도짜리 술도 꺼내주시고, 커피까지 마시면서 삼겹살에 목살까지 더이상 들어갈 수 없을 때까지 먹었다. 10시 반에 찾아갔는데 5시가 다 되어 나왔다 (...)
사실 나는 지금 더 걸어갈 의욕이 별로 없다. 레온은 쾌적하고 다리는 아직 아프며 메세타에서는 이미 카미노의 정수 중 어떤 것을 성취한 것 같기도 하다. 산티아고는 못갔지만 나의 걷는 길은 여기서 끝내도 어느정도 괜찮을 기분이다. (역시 지금 상태는 자아를 20일 정도 찾으면 되는 것이었고 40일은 너무 빡센것 같기도?)
다들 왜그리 다쳐가면서 열심히 걸어가냐고 핀잔 주면서도 한편으로는 처음 보는 사이에 집에 연기 피우며 고기를 구워주는 공쌤이 어떤 면에서는 참 고마웠다.
다시 걸어갈 용기와 동기가 드라마틱하게 돌아왔다고 할수는 없겠으나, 그래도 쬐끔 추스린 것 같다. 혹시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공쌤에게 다시 또 카톡을 보내야지. 덕분에 레온을 무사히 지날 수 있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