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나는 한마리의 연약한 K아재일 뿐이었어

22일차, 사하군에서 레온

by 걷는수달


이른 아침, 레온행 기차를 타기 위해 숙소에서 나와 사하군역으로 향했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깜깜한 시간에 남은 메세타 지역 걷기를 포기하고 길을 나서니 아무래도 유쾌하지는 않다. 도착한 역에도 아무도 없고 좀 쓸쓸하다. 기차 시간을 확인해 보니 8시 48분 출발. 아직 한시간 정도 남았다.


어 근데 한명 두명 배낭을 맨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한다. 이내 모인 사람들은 거의 열댓 명 가까이 되었다. 한국 분들도 꽤 계셨다. 의외로 비슷한 계획을 가진 순례자들이 많았나 보다. 여행 초반 며칠 뵈었다가 까리온에서 아침에 또 뵈었던 한국 분도 여기서 반갑고도 머쓱하게 또 재회했다. 역시 사람 사는건 비슷하군 모두 이쯤에서 메세타를 포기하기로 한건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조금 흐뭇(?) 했다. 왠지 안도감도 들고.

나를 포함한 우리 패잔병들은 다들 피곤해 보이고 조금 아파보이기도 하고 행색이 추레하다. 우리는 왜 사서 아파가며 약간의 패배감도 느껴가며 이 길을 걷고 기차타고 점프도 하는것일까?


표는 역에 있는 기계에서 뽑아야 하는데 카드를 넣는 곳은 없고 결제는 터치로만 되나 보다. 내 한국 신용카드는 유럽식 터치 결제가 안되기 때문에 다른 미국분에게 현금을 드리고 부탁하여 해결할 수 있었다.



레온까지는 약 60 킬로미터. 걸어서는 최소 이틀 코슨데 기차로는 고작 40분 남짓 걸린다. 차창 밖 풍경에는 걷고 있는 순례자들도 보였다. 걷는 사람들을 보니 조금 부럽기도 하고 왠지 죄책감 비슷한 감정도 조금 든다. 동시에 한편으로는 우리는 더 빨리 가고 있지롱 하는 마음도 약간은 있었다. 기차는 순식간에 레온에 도착했다.



레온 역을 나오니 아 하늘이 왜이리 예쁘냐. 패배롭게 도착해 갑자기 도시의 청명한 아침을 맞으니 대학때 밤새 술먹고 아침에 출근하는 사람들 보며 집에가는 기분과도 슬쩍 유사하다. 높은 빌딩, 깨끗한 거리, 있을 것 다 있는 갖춰진 시스템은 새삼 새롭고 맘편하다. 그 사이를 세수도 제대로 안하고 배낭 메고 빛바랜 차림으로 걷는게 좀 민망하긴 한데 그래도 대도시는 언제나 새로워 짜릿해 고져스데스네.


숙소를 찾아가보니 아직 체크인 시간 전이라고 하여 일단 카운터에 배낭 놓고 나와서 어슬렁 어슬렁 대성당쪽으로 한바퀴 돌다가 츄로스 파는 카페가 있길래 냉큼 들어가서 사먹었다. 시나몬이 안들어가고 약간 짭짤한 느낌의 츄로슨인데 이것두 상당히 맛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한번 더 사먹을걸 그랬다)



그리고 또 주변을 한바퀴 도는데 여윽시 멋진 광장. 과연 대도시. 사실 레온이 마드리드같은 대도시는 아니지만 시골길에서 걷고 도장 받던 우리에게는 눈 돌아가는 곳이다. 가우디가 지었다는 건물도 있고 너무나 화려하고 광택이 나는 것.



마침 또 축제기간인가보다. Mercado Medieval 이라고 써있는 현수막이 크게 걸려있다. 단어를 검색해보니 중세 시장 테마의 장터 축제인가보다. 가우디가 지었다는 건물 오른쪽 골목을 따라 각종 장터가 길게 이어지면서 상인들이 옛날식 복장을 하고 각종 먹을 거리며 손으로 직접 만든 재미있는 아이템들을 팔고 있었다. 역시 도시가 좋구먼유.

엄마에게 영상통화를 걸어 (는 한바퀴 돌고 두번째 온 늦오후의 일이지만) 골목을 걸어가며 한참을 장터 풍경을 보여드렸다. 내 얼굴 뒤로 이국의 장터와 알록달록한 풍경이 펼쳐지니 엄마도 조금은 재미있어 하는 눈치다.



체크인 가능한 시간이 되어 숙소에 짐을 풀어놓은 뒤 곧바로 가장 가까운 아시아 식당을 검색해서 찾아갔다. 3분거리에 있는 우동(우돈?)이라는 체인 브랜드다. 김치 우동, 야키도리, 물, 비노띤또 (레드와인) 을 곧장 주문했다. 김치우동은 김치국에 휴게소 우동 그런데 치킨텐더를 곁들인 정도의 느낌이었고 도리야키는 전혀 숯불향 같은 건 없었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약간 얼큰 뜨끈 아시안 풍미에 만족이다.



필받아서 디저트로 추가로 시켜버린 모찌는 초코렛이 들어간 작은 모찌 두덩이가 무려 5유로 가까이 하는데 의외로 맛있었다. 쫄깃함도 그럴싸하고 속에 들어있는 초코렛무스도 훌륭하다. 유럽에서 역시 빵 초코 치즈 햄은 실망시키지 않아. 주문한 3가지 메쥬 중 의외로 모찌가 완성도는 제일 높았다.


숙소는 10유로~20유로 도미토리에서 묵으면서, 엉성한 김치우동 플러스 알파의 점심에 28유로를 흔쾌히 지불하면서 나왔네. 대도시 오니 처음엔 불편했지만 순식간에 관광객 모드가 되면서 돈쓰는 말초적인 재미에 휩쓸리는 나는 역시 한마리 연약한 K아재일 뿐이었던 것인가.


하지만 여기서 멈출수는 없었다.

저녁에는 중국 마트에 가서 너구리(!)를 사다가 숙소에서 끓여서 스페인 햇반이랑 말아먹으니 또 고향의 맛이다.



밥먹고 나서는 오랜만에 반갑게 재회한 론세스 동기친구들 채리사랑 머레이랑 만나서 술한잔 하다가 어쩌다보니 발길닿는대로 2차가다가 실수인듯 호텔과 함께 운영하는 꽤 고급인듯한 식당에 가서 멈 샴페인까지 시켜먹고 말았다. 근데 식당에서 먹어도 우리나라 마트보다 싼 느낌이라 후회는 없도다.


내가 좀 뒤쳐져 있어서 무척 오랜만에 만난건데, 출발 동기를 만나니 또 엄청 반가웠다. 그 친구들은 벌써 레온서 하루 쉬었고 내일 아침에 출발한다고 한다. 나보다 며칠 더 빨리 산티아고 도착 목표라 다시 보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길에서 또 보자고 늘 그렇게 또 씨유 온더 웨이로 작별 인사를 했다.


길에서 만난 인연들은 언젠간 또 보게 된다.

전우애가 느껴지는 출발 동기들을 산티아고까지 꼭 한번은 보게 되기를 고대한다.

체력은 모자라지만 먹성이 좋고 대강 엉성한 구매력도 있는 케이아재는 돈쓸게 많은 도시가 신난다.


10월 9일 일요일 레온

오늘 걸은 길 0km

오늘 기차탄 길 약 60km

산티아고까지 남은 길 약 310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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