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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수돌 Nov 03. 2020

나의 공황장애 극복기

나는 약하면서도 강한 사람이었다

무거운 이야기지만 가볍게 시작해보려 한다


대부분의 현대인처럼 나 역시도 여러 개의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다. 직장에서는 90년대생이지만 90학번 팀원들과도 스스럼없이 잘 어울릴 수 있는 슈퍼 인싸의 길을 걸으면서도, 막상 새로운 집단에 가면 낯을 가려 몇 개월은 만나야 속에 있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지인들 앞에서는 무엇이든 집중해 해내는 열정 만수르의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집에 나 홀로 있을 땐 아침부터 밤까지 거의 10시간 동안 꼼짝하지 않고 휴대폰만 들여다보는 무기력의 대명사가 되기도 한다. 


이런 여러 페르소나 속에서 '강한' 나와 '약한' 내가 공존하고 있다. 이 둘은 균형을 이루면서 살아야 하는데, 그 균형이 조금이라도 무너지면 바로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난다. '강한' 나를 너무 드러내기 시작하면, 육체와 정신 모두 진짜 강하다는 착각에 빠져 몸을 혹사시켜가며 일하거나 스트레스를 제때에 풀지 못해 정신이 망가지게 된다. 반면에 '약한' 나를 자주 드러내면, 진짜로 나 자신이 약하다 생각해 금세 포기하거나 자표자기한 채 무기력감에 빠지게 된다. 그렇게 두 페르소나가 균형을 잡지 못해 결국 나는 마음의 병을 얻어야 했었다. 

출처: Unsplash(https://unsplash.com/,  내면을 들여다보는 게 사실 제일 중요하면서도 가장 좋은 대안이지)


처음 병이 발현된 것은 대학생 때였다


당시 대학교 3학년이었던 나는 학과 학생회 임원 활동부터, 전공수업과 각종 팀플, 대외활동, 아르바이트로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바쁘지만 하나라도 소홀히 하지 않고 모두 완벽하게 해내겠다는 신조로 불철주야 뛰어다녔었다. 아르바이트와 대외활동으로 정신없어 시험공부는 시험 기간에만 할 수 있었는데, 그때만큼은 도서관에서 숙식하며 공부에 몰입한 채 집에도 가지 않고 망부석이 되어야 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아르바이트를 위해 아침 일찍 직장인들이 붐비는 통근시간에 길을 나섰다가 이전까지는 겪어보지 못했던 '것'을 경험했다.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문득 '내가 지금 숨을 쉬고 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숨이 가빠지는 것은 물론 스위치가 꺼지는 것처럼 눈 앞이 까매지고 현기증이 났다. 지하철에 사람들로 가득 차기는 했지만 산소가 부족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코와 입으로 숨을 몰아서 쉬면 쉴수록 호흡을 하지 않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몇 분 정도 지났을까, 더 이상 가다가는 쓰러지거나 죽거나 하겠다는 생각에 얼른 내렸고 결국 아르바이트는 지각하고야 말았다. 


그 뒤로 몇 번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특히 지하철이나 엘리베이터처럼 밀폐 공간에 사람들이 많을수록 호흡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때는 단순히 사람들이 많아서 발생하는 산소 부족으로만 치부했다. 부모님께 말씀드렸을 때도 당시엔 '공황장애'라는 단어가 그리 많이 들리지 않을 때라 모두  그저 내가 잠도 못 자고 바쁘게 살아서 피곤한 것일 뿐 다른 병은 없다고 여기셨다. 그 뒤 부모님의 조언에 따라 아르바이트는 그만두었고, 대외활동도 활동기간이 끝나고서는 더 이상 새로운 활동을 찾지 않았으며, 학기 시작 전 최대한 지하철에 사람들이 많이 붐비지 않는 시간대로 수강신청을 했다. 그렇게 공황장애를 마주할 순간들을 피하다 보니 어느새 기억 속에서 자연스레 잊혔었다. 


잊혔던 기억이 떠올랐다


다시 마주할 순간이 영원이 없었다면 다행이었겠건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강한' 나와 '약한' 나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며 살아가던 중 현재 다니고 있는 회사의 정규직 입사 전 전환형 인턴으로 근무하던 때 나는 또다시 공황장애를 경험해야 했다. 치열한 경쟁이 익숙하지 않던 상황에서 매주 팀 과제와 개인 과제로 집에 올 때쯤이면 긴장감에 녹초가 되었고, 혹여나 입사 전 탈락하지는 않을까 걱정과 근심에 살아야 했기 때문이었을까. 다시 나는 마음의 병을 얻게 되었다. 


평소와 같이 출근하던 어느 날 아침, 유독 사람이 많은 그런 날이었다. 사람들 틈 사이로 간신히 두 발을 딛고서는 경의선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순간 대학시절과 마찬가지로 숨이 안 쉬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윽고 숨을 몰아쉬는 데도 마치 바닷속에 있는 것처럼 호흡을 전혀 하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지금 내리면 배차 간격이 긴 경의선 특성상 다음 차를 탔다간 회사에 지각을 하게 될 텐데' 하고 걱정이 들어 쉽사리 내리지 못했다. 다행히도 내가 몸이 불편해 보였는지 어떤 마음씨 좋은 아주머니가 양보해주신 덕에 자리에 앉을 수 있었고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숙여 사람들을 보지 않자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병원은 가지 않았다 아니 못 갔다는 게 맞다


수많은 연예인들이 대중에게 공황장애가 있음을 고백하고 난 뒤였기에 당시에 나는 공황장애가 무엇인지 잘 알 고 있었다. 부모님도 예외는 아니었지만, 경의선에서 겪은 일련의 사건을 이야기했을 때에도 적절한 조언을 해주시진 못했다. 단지 조금 더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해서 사람들이 붐비는 지하철을 타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것 정도. 현재 전환형 인턴을 하고 있던 터라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는 것이 또 그런 기록이 남는다는 것이 마이너스 요소로 작용될 수 있기에, 또다시 부모님은 근본적인 치료 방법 대신 그런 상황을 피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만 조언해주셨을 뿐이었다. 


그때 부모님의 말을 안 듣고 치료를 하러 병원에 갔다면 내 삶을 또 어떻게 변했을까. 전환형 인턴에서 떨어지는 것이 두려워 결국 나는 치료를 받지 않았고 그 뒤로 정규직으로 입사 후에도 몇 번 같은 상황을 겪어야 했다. 그 뒤로 가끔 증상이 심할 때는 혼자 엘리베이터를 타도 숨을 못 쉬겠다는 생각이 들어 계단을 이용해야 했다. 


생각보다 나는 약하면서도 강했다


가까운 사이의 지인들에게도 말하지 못했지만, 1년 차 때 정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공교롭게도 탕비실 맞은편이 내 자리인지라 탕비실을 오고 가는 사람들에게 '신입'으로서 계속해서 인사를 해야 했고, 숫자를 해석하는 데 익숙하지 않던 내게 분석력을 발휘해야 하는 보고서 업무가 떨어져 매일 야근해야 했다. 그러면서도 상사에겐 '일을 하지 못해 야근하냐'는 말을 들어야 했다. 그래서였을까. 자신감이 점차 줄어들었고 직장에서 우울한 날들이 많아졌다. 그럴수록 일상생활에서 더 자주 공황장애로 인한 불편함을 겪어야 했다. 이러다가 죽지 않을까, 내 안의 내가 서서히 망가지겠다는 생각이 들던 때였다. 


그때쯤엔 더 이상 피하지 못하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 순간을 경험하지 않도록 피해오던 데 익숙했지만, 피할 수 없을 정도로 일상생활 속에서 공황장애는 점점 더 나를 괴롭혔기에 대안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그냥 부딪히기로 했다. 처음엔 생각을 바꾸는 것부터 시작했다. 숨이 안 쉬어진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숨을 아주 잘 쉬고 있으며 절대 호흡 때문에 죽지 않을 것이라고 계속해서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숨 쉬는 게 어려웠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적어도 '곧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은 떨쳐버리게 되었다. 


그런 다음 2년 차 때는 스쿠버 다이빙 동호회에 가입해 25m가 넘는 깊은 바닷속에서 호흡하며 차츰 밀폐된 공간에 대한 두려움을 없앴다. 처음엔 스쿠버 다이빙 장비를 모두 갖췄음에도 연습을 위해 들어간 잠수풀에서도(26m) 바닥까지 내려가자마자 올려다본 싱크홀의 깊이에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나 혼자 수면 위로 올라와야 했었다. 계속해서 연습한 끝에 바다에서 스쿠버 다이빙을 하게 되었지만 그마저도 처음엔 바다에 들어가자마자 혼자 숨이 안 쉬어진다고 겁을 먹고서는 들어가지도 않으려고 했다. 그런 과정을 겪어 결국 자격증을 땄고 바닷속에서도 장비의 힘을 빌려 자유롭게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공황장애를 극복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완전히 이겨냈다고는 이야기할 수 없는 건, 공황장애는 언제 어디서든 재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수록 정말 야기하지 못한 상황에서 불쑥 공황장애로 인한 불편함을 겪게 될 수도 있다. 때문에 '극복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정도로만 지금 상태를 표현하지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정신적 스트레스를 거의 받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상황의 변화가 공황장애를 겪던 내게 아주 효과 좋은 치료제로 작용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만약 또 공황장애가 발현된다면, 이제는 시간이 약이다 라는 생각의 자연치료보다는 병원에 가서 적절한 치료를 받을 것이다. 마음의 병이 있다는 것이 사회에서 큰 마이너스 요솔 치부되는 것이 안타깝기에 나부터라도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야겠다는 마음에서이다. 게다가 열심히 살고 있는 내게 그런 병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손가락질받을 이유는 아니기에, 일상에서 노력하는 한편 치료제를 통해 더 빨리 그런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나 자신을 도와주고 싶다는 이유에서 이기도 하다. 


끝 마치며


오늘은 평소 자존감이 높아 보이는 말과 행동으로 대중에게 회자되었던 한 사람이 세상과 작별한 날이다. 죽음에 대한 사유는 고인만이 알고 있는 것일 뿐 우리는 감히 헤아릴 수 없다. 다만, 그녀도 혹시 대중이 모르는 세상 속에선 약한 사람이었기에 힘든 삶 속에서 죽음을 선택하지는 않았을까 싶었다. 그래서 잠이 오지 않는 이 밤에 이 글을 써 내려갔다. 우연히라도 힘든 상황을 마주한 분이 이 글을 읽으신다면, 공감하며 작은 위로라도 얻으시길 바라는 마음을 글에 눌러 담았다. 우린 약하면서도 극복해낼 수 있는 강한 존재이기에, 나도 해내고 있으니 분명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해내리라 믿는다. 우리는 우리 다운 모습으로 우리답게 잘 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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