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 직장생활은 민소희처럼
얼마 전 직장상사에게 들은 말인데, 이 뜻을 헤아리기가 참으로 난감했다. "아, 넵 제가 또 한 잡일 하죠! 하하하"라고 사람 좋은 척하면서 넘어갈지, "아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하세요? 님이 해보시던가요."라고 진심을 담아 싫은 소리를 할지 잠시 고민이 되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고민 끝에 전자와 후자 모두 선택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이렇게 이야기했다. "군말하면 저만 손해죠. 이러다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려고요."
사실 하고 싶었던 말은 후자에 가까웠지만, 악의가 담겨 있다기보다는 '4년 차인데도 가장 막내라 잡일이 많은데도 불평 없이 해내는 내가 신기했겠지'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게 내 정신건강을 위한 일이니깐. 직장생활을 1년이라도 해본 사람은 이런 말에 일일이 받아치는 것이 오히려 본인에게 손해임을 뼈저리게 알 것이다. 게다가 상사인데 "너 지금 말을 뭐 그런 식으로 하니"라는 어투로 지적질을 하기엔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럼에도 저 문장을 대답으로 선택한 것은 나 역시도 불만이 많다는 것을, 그래서 이직하고 싶은 나의 마음 내비치는 동시에, 그리고 당신의 물음에 나를 향한 배려는 1도 없음을 돌려서 까기 위함이었다. 당신의 물음이 그리 기분 좋은 일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한마디로 나는 내 역할을 할 뿐이다라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나의 대답에 "아 진짜? 사라진다고?ㅎㅎ"라는 뉘앙스로 웃으면서 대답한 나의 상사. 이 분은 과연 내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였을까, 아니면 내가 실없는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했을까.
나의 이러한 소심한 복수에 대해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너무 착하게 말했는데?" 아니면 "별것도 아닌 걸로 너무 속좁게 생각하는 거 아냐?'
재작년의 나였으면, "아 괜찮아요 ㅎㅎ 이러면서 배우는 거죠"라고 교과서처럼 대답했을 것이다. 그 시절의 나는 '착하다'는 말을 듣던 사람이었으니깐.
"남수돌씨, 진짜 요즘 사람답지 않은 것 같아, 참 착한 것 같아" 그때의 난 이 말을 그저 칭찬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러나 해가 지날수록 직장생활에서 '착하다'는 말에 진정으로 담긴 뜻이 우리가 흔히 아는 그 착하다는 말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직장생활에서 누군가를 가리키며 "저 사람 참 착한 사람이다"라고 할 때 '착하다'를 사전적인 의미로만 받아들여선 안된다.
[직장생활에서 '착하다'는 뜻]
의미 1) 저 사람 참 성격은 좋은데, 일은 잠 못하더라. 성격이 유일한 장점인 듯" (대략 70% 정도)
의미 2) 저 사람은 남 도와주다가 시간만 다 갈듯.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더라" (대략 20% 정도=아마도 나)
의미 3) 저 사람은 진짜 착하더라. 일도 잘하고 착해 (대략 10% 정도. 이런 사람은 누구나 탐내는 인재다)
예전의 나라면, "저 사람 참 착해" 라던가 "저 사람은 참 직장생활을 잘하는 것 같아"라는 말을 꼽았겠지만, 이제는 "저 사람은 참 자기가 맡은 일은 잘 해내는 것 같아!" 말이 최고의 칭찬으로 들린다.
직장에서 다른 동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중간만 가도 성공한다는 말처럼 오히려 다른 사람들과 자발적인 거리두기를 통해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자신의 일을 잘 해내는 사람. 그것이 직장에서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인간성은 별로라는 말은 듣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동시에 모두에게 친절한 사람이라고 불리고 싶지도 않다.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정도의 인간성과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와중에도 나한테 잘해주는 한정된 사람에게만 친절한 사람.' 딱 그 정도가 직장생활에서 가장 적합한 태도라 생각한다.
여기에 더불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으스대지 않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공로를 숨기지도 않고 자신이 무엇을 잘하는지 적절한 순간에 어필을 잘하는 사람이면 금상첨화지! (그런 사람이 되려면 타고난 것일까 의문이 들 때도 물론 있지만.)
우리 회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회사 규모는 작지만 인간관계에서 중간만 가면서도 본인이 맡은 일은 빈틈없이 잘 해내는 사람이 몇 분 계신다. 딱히 '착하다'라는 평가를 듣지도, '인간성 더럽다'라는 소리를 듣지도 않지만 한번 일을 맡기면 진짜 똑소리 나게 빠른 시간 안에 잘 해내는 사람. 다행히도 내 사수가 그랬고, 옆팀의 과장님의 그런 사람들이라 몇 년 동안 관찰할 기회가 있었다.
관찰 결과 '독하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자기 일만 잘하려 드는 사람이면 '저만 안다', '싸가지 없다'라고 한 소리를 들을 텐데, 이들은 자기 일도 잘하면서 도움을 필요한 사람이 먼저 손을 내밀면 적절하게 '물고기를 잡는 법'을 알려주기까지 했다. 독하다가 가진 본래의 의미인 '성격이 모진 사람' 아닌 '자신의 일에는 독기를 품고 일하는 것처럼 잘 해내면서, 자기 일만 하기도 바빠 먼저 나서지는 않지만 상대방이 도움의 손길이 필요하다고 먼저 손을 내밀 때 적절하게 잡아줄 수 있는 사람' 그것이 21세기 직장생활에서의 진정한 독한 사람의 표본이며 이들만이, '독한 사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착하다는 말을 이젠 그만 듣기 위해서, 4년 차가 된 올해 다짐한 것들이 몇 가지 있다.
더 이상 다른 이들이 본인 시간 없다는 핑계로 부탁하는 잡일은 하지 않기로 했다.
싫다, 좋다는 분명하게 표현할 것.
아무리 직장이라도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한 행동은 이것이 맞는지 꼭 고민해볼 것.
내가 직장에서 기댈 수 있는 곳은 나 자신밖에 없으므로, 손해 입으면서까지 다른 이들을 위한 행동을 적어도 '직장에서만큼'은 하지 말 것
오늘의 인생의 주인공은 나니깐, 직장에서도 '나를 위해' 일하고, '나를 위해' 생각하며 '나를 위해' 살 것.
이 모든 다짐이 과연 얼마만큼 지켜질까 싶지만. 필요하다면 아내의 유혹 민소희로 빙의해서 눈 옆에 점 하나 찍고, '남수돌'이 아니라 '남스돌'인데요. 하면서 독해져야지. 우리 모두 슬기로운 직장생활을 위해 착하지 말고 독합시다! 다 같이 민소희가 됩시다! 파이팅!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