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지 않고 일할 권리
나는 '일하다가 죽을 수 있겠다'라고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택시기사셨던 아버지가 비 오는 날 운전하러 나가시면, 빗길에 혹시 사고라도 나지 않으실까 걱정되어 잠을 설친 적이 있다. 하지만 아버지가 운전대를 놓고 직업을 바꾼 뒤로, 그리고 내가 회사에 들어간 뒤로 '일이 잘못되면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은 잊은 채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러다가 최근 집에 에어컨을 바꾸면서, 내 생각이 참 어리석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에어컨을 구입할 당시, 실외기 설치에 대한 안내사항을 듣던 중 '위험수당'이라는 말을 듣고 의아했었다. 위험수당이라고 표기해놓은 비용 자체가 내 예상보다 너무나 낮았기 때문이었다.
10층에 사는 우리 집에 실외기를 설치하러 오실 에어컨 설치기사님의 위험수당은 3만 원.
물론 가치가 없을 정도로 적은 액수는 절대 아니었지만, 기사님이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 있음에 대한 대가로 단돈 3만 원을 낸다는 것은 내 양심에 가책을 느낄 수준이었다. 기사님이 우리 집에 오셨을 때, 이전에 사용하던 앵글이 녹슬어 교체가 필요하다 하시면서 위험수당은 아예 받지 않고 앵글 값만 내라고 하셨다.
기사님께서 위험수당을 거절하셨기에 막연하게 에어컨 설치 기사님들 같이 위험한 환경에서 일할 경우엔 보험에 모두 가입되어 있는 줄 알았다.
아무리 2인 1조라 해도 10층이라는 높이에서 위험하게 작업하시는 기사님들에게 당연히 보험이라는 안전장치가 있겠지라고 생각했던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그 생각이 오산이었음을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다.
우연히 퇴근길에 접한 JTBC "에어컨 설치 하청업자들의 죽음"이라는 뉴스 덕분이었다.
기사 URL : http://news.jtbc.joins.com/article/article.aspx?news_id=NB11953624
뉴스 속 에어컨 설치 기사님들이 처한 상황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4층 높이에서 추락하여 동료는 현장에서 숨지고, 1년 넘게 치료에 매달려야 하는 에어컨 설치 기사님.
본인이 크게 다치고, 동료가 숨진 상황에서 모든 책임은 설치 기사님들에게 향해 있었다. 원청에서 1차 하청업체, 거기서 다시 2차 하청업체와 설치기사님들이 위탁계약을 맺었기 때문이었다.
권리조차 주장할 수 없는 에어컨 설치기사님들의 현실.
1인 사업자로서 위탁계약을 맺기 때문에 이 분들은 산재보험 등 의무가입 대상에서도 제외되는 말 그대로 안전사각지대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노동자처럼 일하지만, 법적으로 특히 사고가 나면 사장님이 돼 버리는 특수고용노동자들입니다. 대리운전과 배달, 화물 노동자를 비롯해서 200만 명이 넘습니다.
- JTBC 뉴스 내용 인용-
너무나도 당연한 말, [죽지 않고 일할 권리]
그러나 누군가에게 이 말은 당연하지 않을 수 있는 말이었다. 우리 주변 누군가에게는 '죽지 않고 일할 권리'란 일을 무사히 잘 마쳤을 때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보상이었음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이렇게 위험한 데, 왜 일하려는 거야?"
에어컨 설치기사님들이 설마 본인 일이 위험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일하시는 걸까? 우리 아버지도 택시를 운전하면서 20년 넘게 늘 새로운 사고를 마주할 수밖에 없다고 하셨었다. 그럼에도 생계가 달린 일이니 어제 사람이 몇이나 죽은 큰 사고를 목격하더라도 오늘 다시 운전대를 잡을 수밖에 없으셨겠지. 에어컨 설치 기사님들도 같은 이유겠지.
에어컨 설치 기사 채용공고를 검색해보면 초보자여도 월급은 250~300, 일급은 10만 원 정도로 웬만한 일반 중소기업보다 더 많이 준다고 광고하고 있다. 이분들이 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에어컨 설치 기사로서의 삶을 시작하는 이유가 결국 돈 때문이 아니셨을까.
뉴스 하나 때문에 세상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여전히 에어컨 설치 기사님을 비롯한 특수고용 노동자들은 안전 사각지대에 놓일 것이고, 그들의 생명을 보호해주는 장치는 쉽게 마련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에어컨 같이 한철 장사의 경우, 직원으로 운영하는 것보다는 인건비, 관리비용 등을 고려하자면 1인 사업자들과 필요에 따라 위탁계약을 맺는 것이 업체 측에 훨씬 더 이득일 것이다. 기업은 영리를 추구하기 때문에 절대 이익 대신 손해를 감수하지 않기에 쉽게 계약형태가 바뀌진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모두는 알아야 한다.
저 머나먼 외국의 어느 현실이 아닌 대한민국 하늘 아래 같은 인간이면서도 최소한의 권리조차 누리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 모두는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의 가족이, 친구가, 혹은 동료가 똑같은 상황에 처할 수 있음을 항상 생각하며 최소한의 인간다운 권리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고,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