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는 기억 속에 와인셀러를 장만하는 것이다"
서재에 책이 많으면 책 읽기가 잘 될까? 흔히 생각하기에 집에 책을 많이 보관하면 독서량이 늘면서 책도 많이 읽을 것 같다. 주변을 보더라도 책을 많이 읽는다는 사람들은 책에 항상 서재를 갖고 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꿈은 멋진 서재를 만드는 것이다. 필자 역시 그런 희망을 품고 산다.
와인 애호가들은 와인을 구매하여 보관하는 와인셀러(wine cellar)를 갖고 싶어 한다. 전에는 지하 창고 등에 와인을 보관했다. 지금은 보관 온도를 적정하게 조절하는 저온기능이 있는 책장과 같은 형태의 와인셀러가 일반 가정에서도 사용된다. 와인셀러의 가장 큰 장점은 적정 온도에서 와인을 보관함으로서 언제든지 고유의 맛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와인셀러와 서재의 공통점은 언제든지 즐길 수 있도록 가장 알맞은 상태로 보관한다는 것이다. 책도 구매한 즉시 바로 읽지 않는다면 일정한 공간에 보관하고 시간이 날 때마다 읽어야 한다.
과연, 책을 보관하고 나면서 얼마나 그 책을 읽을까? 필자는 경험으로 사고 쌓아놓기만 한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연간 100권 이상의 책을 사면 당연히 그 정도는 읽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왜 그럴까? 장서 수집가로서 책을 샀기 때문이다.
필자처럼 책을 많이 사는 수집가들은 책에 대해 아는 것과 책 내용을 아는 것을 혼동한다. 책은 읽어야 한다. 책 한 권을 제대로 읽으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여러 종류의 책들을 구매하면 책을 대충 보고 다음에 어떤 책을 살지 고민한다. 제목과 목차, 본문 내용을 쭉 훑어보는 정도로 한 권을 다 읽었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만약 한 권을 사서 읽는다고 생각한다면 그다음에 본문을 찬찬히 읽어갈 것이다. 한 권을 그렇게 정성스럽게 읽어야 할 필요가 없다거나 책 내용에 따라 그럴 필요가 없다고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필자는 여기서 와인셀러에 보관하는 와인과 책을 비교하고자 한다.
와인셀러의 기능은 와인의 맛이 변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와인은 외부 환경에 따라 항상 화학적으로 반응이 일어난다. 특히 온도에 민감하다. 그래서 적정 온도를 중요하다. 와인은 맛이 중요하다. 와인의 고유한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와인 그 자체의 순수성이다. 처음에 만들어진 와인이 만약에 유통 과정이나 보관 중에 변질한다면 우리가 제대로 즐길 수 없을 것이다.
책은 와인과 달리 세상에 책을 만들어 나온 뒤에도 그 자체가 변하지 않는다. 단지 독자가 어떻게 읽고 생각하느냐가 그 책의 가치를 결정할 뿐이다.
만약에 와인셀러처럼 책의 가치를 보존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책꽂이에 책을 사서 보관할 것이다. 필자가 1,000권이 책을 사서 보관하면서 반성하는 것이 바로 이 대목이다. 서재는 와인셀러처럼 시간이 지나도 책의 가치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의 기억에서 책(목록)을 잊게 만든다.
책은 구매하거나 손에 놓았을 때 바로 읽어야 한다. 보관하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더 읽어내기 힘들다. 처음에 가졌던 책에 대한 흥미가 점점 사라지기 때문이다. 언젠가 책장에서 우연히 마주쳐 나의 기억 속으로 다가올지 모르지만, 기대를 해보기도 하지만 비용적인 손실이 크다.
와인셀러처럼 책을 잘 보관하는 유일한 방법은 구매할 때마다 읽고 기억해두는 것이다. 와인은 즐기기 위해서 개봉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맛이 변하기 때문에 개봉과 동시에 빨리 마셔야 하지만 책은 언제든지 읽어도 새롭다. 단, 기억에 속에 잊히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와인셀러를 이용하면 와인을 오랫동안 즐길 수 있다. 책을 구매하여 처음부터 책 내용을 천천히 읽어가는 것이 우리 기억 속에 와인셀러를 장만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