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주 차: 유연 근무

이번 주, 나는 동료의 모니터 화면에서 이력서라는 단어를 발견했다.

by 수혁


눈이 번쩍 하고 떠졌다. 이런 기상은 오랜만이었다. 요즘 꽤나 피곤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검토받을 업무도, 검토할 업무도, 내가 직접 마무리해야 할 업무도 꽤나 많았다. 거기에다가 업체들의 요청들도 있었다. 이런 날의 아침은 특별했다. 역설적으로 빨리 출근해서 일을 하고 싶어지기도 했다.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니깐, 여러 업무들(업무 출장 준비, 사업 과제 검토, 내부 업무 검토 등)도 빨리 처리해버리고 싶어졌다. 그래서 일찍 출근을 했다. 8시 20분 즈음 사무실에 들어서니 한 동료가 먼저 출근해 있었다. 우리 회사는 이번 달부터 유연근무제를 시행했다. 아침 9시를 기준으로 1시간 내외의 출근 및 퇴근이 가능했다. 이미 규정에는 있었지만 시행되지 않다가, 꾸준히 건의를 해서 시행이 성사된 터였다.


먼저 출근해 있던 한 동료는 무언가 집중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빠른 업무 세팅을 위해 사무실을 오갔다. 나의 루틴은 1층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1잔을 가져오고 정수기에서 물 1컵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그렇게 오가는 와중에 조금 신기한 장면을 캐치했다. 동료의 모니터에 48포인트 수준의 큰 글자로 ‘이력서’라고 써져 있는 것이었다. 절대 일부러 보려던 건 아니었고, 마치 지하철 문 앞에서 앞으로 시선을 고정하다 보면 맞이하는 ‘여의도역’ 수준의, 지나가다가 저렇게 큰 글자를 못 볼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의 크기였다. 못 본 체 지나가려 했는데, 모니터 속에서는 빠른 화면 전환이 되는 걸 추가로 목격했다. 여러 복잡 미묘한 감정이 크게 세 가지 정도로 연쇄되었다.


첫째, 누가 보아도 이직 준비로 생각되는 장면을 살면서 처음 목도해 봐서 너무 신기했다.

둘째, 업무 관리를 하는 입장에서, 불만 혹은 애로사항이 있었는지 걱정이 되었다.

셋째, 더 나은 커리어를 위한 도전이라면 진심으로 축하해 주고 조언해주고 싶었다.


위의 감정들이 있었다고 해도, 서로가 모니터 화면을 못 봤거나, 봤더라도 언급하지 않는다면 아무 일도 없을 것이었다. 다만, 애석하게도 나의 위치가 어느 정도 업무 및 조직 관리를 해야 하는 위치라, 알게 된 마당에 상황을 미리 파악을 하는 게 베스트였다. 나는 이 방식이 서로의 신뢰감 유지와 커리어에 좋을 것이라고 믿었다. 결국, 고민 끝에 오늘 일이 있었던 동료뿐만이 아닌, 다른 동료들과의 티타임을 연쇄적으로 가졌다. 따로 할 이야기가 있을 때는 천장이 오픈되어 있는 사무실 내 회의 공간보다는 카페를 선호했다. 보다 더 자유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였다. 다른 직원들과도 업무 애로사항이 있는지를 이야기했다. 요즘 일이 많은 시기이지만 이미 계획된 일들이기에 큰 문제가 없다는 이야기들을 들었다. 실제 속 마음은 어떠할지는 모르겠지만, 내 입장까지도 고려한 이야기들을 해주니 너무 감사했다.


이윽고 오늘 아침, 이력서를 모니터에 띄어 놓은 문제의 동료(?)와의 티타임이 다가왔다. 먼저, “요즘 많이 힘드시죠?”라는 질문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동료는 “네? 전혀 아닙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래도 요즘 새로 시작된 업무와 늘어난 추가 업무들에 대한 열거를 해보았다. 가만히 듣던 동료는 질문했다.


“혹시, 보셨을까요?”

“네???”

“이력서라고 쓰인 문서 띄워진 거요.”

“아하하. 보려고 본건 아니고, 너무 글자가 커서 저도 모르게 그만.”


그제야 동료는 마음이 조금 풀린 표정으로, 회사에 입사한 후 이직을 시도한 적이 없고, 현재 이직할 마음도 없다고 단언했다. 들어보니, 외부 단기 활동에 필요한 문서였다고 한다. 본인이 다니던 학교 산하의 연구기관에서 요청한 양식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여러 목적(지원 과제 및 수당 지급 등)으로 요청할 수 있다는 걸 이해했다. 나 역시도 가끔 외부 기관에서 요청이 오면 외부 활동 참여를 위해 연차를 사용하기도 하고, 이를 위해 해당 기관에 이력 및 경령 증빙 서류들을 제출했었다. 하긴 다시 한번 생각해 봐도 요즘 시대에 누가 이력서 문서의 제목을 이력서라고 크게 박힌 양식을 사용할까 싶긴 했다. 서로 오해가 풀린 뒤에도 자신의 개인 메일을 보여주며 오해의 증거까지 보여주려는 걸 가까스로 말린 뒤에야 면담을 종료했다.


어쩌면, 유연근무제의 조기 출근이 가진 장점과 단점을 모두 발견한 하루이지 않았을까 싶다. 장점은 아침 일찍 출근하여 주어진 업무가 딱히 많지 않음을 확인하였을 때, 나의 개인 시간을 조금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고, 단점은 이력서를 쓸 때 들킬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누군가 사람인 혹은 잡코리아를 열어둔 걸 보았을 때, 그때는 UFC라고 생각하는 게 맞겠지?


물론, 진심으로 이직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해도, 축하를 할 마음을 갖고 있었다. 좋은 마무리를 위해서라면, 축하와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게 나의 방식이었다. (가급적이면 그렇게 하려고 노력했다.) 나의 이직 경험들과 적지 않은 동료들을 맞이하고 떠나보냈던 경험을 통해, 특히 일로 만난 관계는 시작보다는 끝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끝이 좋지 않아서 빼고 싶은 경력이 있다면 이력서에서 뺄 수 있다. 그러나 인생의 어떤 기억을 일부러 잊을 수는 있겠으나 되돌릴 수 없듯, 건강보험자격득실확인서에서도 나의 이력을 제외를 할 수는 있겠으나 삭제할 수 없다. 다른 곳으로 이직할 때 즈음, 자격득실내역 제외 버튼을 누르는 건 귀찮음을 넘어, 늘 재직 당시의 좋지 않은 끝을 떠올리게 했다. 또한, 얼굴 붉히며 나온 전 직장에 경력 증명서, 원천징수영수증을 요청할 일이 있을 수 있고, 심지어는 전 직장에서 만난 사람들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다시 만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4년 전 퇴사한 전 직장에 무언가를 요청할 일이 있을 때 늘 고향처럼 편안했다. 그간의 안부를 묻기도 했고 가끔 음료를 들고 찾아가기도 했다. 물론, 그렇지 못한 곳들도 있었다. 꼰대스럽긴 하지만 기회가 된다면 동료들에게 이 말을 꼭 전하고 싶다.


시작했다면 함께 성장을, 떠난다면 함께 축하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부디 반갑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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