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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한 차별주의자

선량한 차별주의자

by 차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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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어느새 세월이 지나가는 것을 잊곤 한다.

그래서 또래 아이들이 읽는 책으로 생각하지도 못했던 책을 들고 오면 깜짝 놀라게 된다.

오늘 소개할 작품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딱 그런 느낌이었다.


사실 예전부터 입소문으로는 많이 전해듣고 있던 책이었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민감함 이슈를 다루고 있는 내용에, 동화 작가 지망인 졸렬한 지성으로 내가 감히 보고

사고할 여지가 있을까 하는 우려가 있어서 읽기를 망설이던 책이었다.


그런데 이번 기회에 우연히 보게 된 이 책을 통해서 느낀 감상을 한번 적어보려고 한다.

여전히 나의 지성이 이 작품을 평하기에는 많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니,

그저 개인의 의견이라는 것을 감안하고 서평을 보아주셨으면 하는 당부로 시작해보자.


인문서이다 보니 스토리가 있을리 없고, 그러니 내용을 서술하는 것을 생략하도록 하겠다.

그래서 이번에 리뷰는 내가 느낀 주관적인 감상과 의견을 기반으로 이야기를 풀어보려고 한다.


일단, 이 책을 정독하고 나서 내린 나 개인적인 의견은, 유감스럽게도 다소 실망스럽다는 것이다.

음... 너무 기대가 컸기 때문일까? 아니면 지금의 시대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이념과 사상의 대립에 진절머리가 났고, 어쩌면 이 책이 그 해법을 제시하리란 희망을 품었던 탓일까?


유감스럽게도 결론은 실망감이 크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이제부터 왜 그런지에 대해서 한번 두서없이 적어보려고 한다.


책은 말한다. 우리가 체감하지 못하는, 다수이고 기득권이고 모태에서 부터 부여받은 권리가 존재하고

그에 비해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소외된 존재가 실존한다고.


그래서 우리는 당연하다고 느끼고 행동하는 것도 어쩌면 그들에게 차별이 될 수 있다고.

그 누구도 스스로 악인이 되려고 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그런 기본적인 사고 속에서 소외된 상대를

차별하고 불편하게 만드는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동감한다. 그리고 굳이 내 개인의 동의가 없어도 그것은 보편적인 진리이다.

세상은 틀림없이 우리 스스로조차 모르는 기득권을 가진 그룹이 존재하고 그들의 행동은 거기 속하지

못한 차별대상자를 고통스럽게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보편적인 전제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고,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유감스럽게도 이 책에서는 지나칠 정도로 나이브하고, 어찌보면 무책임할 정도로 일방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지금 세상에 이슈로 떠오른 옳바름에 대한 이슈를 주장하는 입장과 동일하게.


다 맞는 이야기다. 사람은 그 누구도 스스로 악인이 되고자 하는 이는 없다.

이는 단순히 그 사람의 내면의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이고,

그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사회에 속할 최소 자격인 선함의 근본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누구나 선함을 추구하고, 그것이 옳다고 믿고 그것을 실천하려 한다.

하지만 개인 각자가 생각하고 추구하는 선이 절대적인 선인가를 묻는다면 그것은 또 그렇지 않다.

단순한 예시로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로 간단히 입증된다.


수용소에 일하며 학살을 주도한 이들이 인간으로서 근본조차 글러먹은 태생적인 악인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그들은 다들 누군가의 아버지였고, 누군가의 친구였고, 한 사회의 신뢰받는 일원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보편적인 사회의 결정에 동조하여 스스로 믿는 선을 행했다. 홀로코스트라는 이름의.


이 내용은 이 책에서도 언급된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으로서 세상에 강렬하게 인지되었다.

그래서 이 책은 그런 보편적이고 인지하지 못하는 차별주의자들에 의해 자행되는 선량한 차별을 경고하며

그것을 배제하고 자각해야 한다고 성토한다.


그리고 그 보편성에서 소외된 대상들, 외국인, 여성, 장애인, LGBT 등의 차별이 차별금지법이란

제도적인 기준으로 보호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부터 내 실망감이 시작되었다.


한번 물어보고 싶다. 나치 수용소에서 학살당한 자들과 가자 지구를 학살하는 자들이 다른 자인지.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다. 둘다 유대인들이다. 서있는 장소와 시간과 조건만 달라졌을 뿐 같은 존재이다.

왜 그들은 그때는 차별당하는 자들이었다가, 지금은 차별하는 자가 되었을까?


그건 바로 책에서 언급한 한나 아렌트의 명제로 동일하게 설명된다. 바로 악의 평범성이다.

천부적으로 기득권에 존재하는 자와 존재하지 않는자가 존재하고,

전자가 무의식적으로 후자에 행하는 차별이 존재한다고? 동의하기 어렵다.


그건 언제 어디서든 바뀔 수 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건널 수 없는 골짜기를 두고 갈라진 것이 아니고

언제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그 포지션은 바뀌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은 비겁하다.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문제라고? 그렇다면 사악한 차별대상자는?

과연 지금 차별당하는 자가 영원히 거기 얽매인 존재라는 것을 누가 보장하는가?

그리고 그들이 차별이라는 당위성을 가지고 더 사악한 차별주의가가 되는 것은 누가 방지하는 가?


이 책은 그 문제에 대해서는 눈을 돌리고 너무나 근시안적인 눈앞의 차별주의자만을 규정짓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보면서 문득 앨런 무어의 작품, 와치맨(watchmen)에 나오는 대사를 떠올렸다.


who watches the watchmen? 누가 감시자들을 감시하는가?


지금 상황에 딱 떠오르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 세상이 그르지 않게 하기 위해 감시하는

감시자가 된다면, 그 감시자들이 그르지 않게 감시하는 것은 누구인가?


유감스럽게도 이 책에서는 거기까지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저 감시가 필요하다는 주장만 언급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에 많은 안타까움과 아쉬움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그저 그런 이야기를 듣기 위해 이 책을 읽었던 것이 아니고, 어쩌면 여기서 모두가 바라는 긍정적인

방향성이 제시되리라 믿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저 스스로 불합리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사회가 자신에게 친절하게 해야한다고 주장하는

극렬한 차별대상자들이 과연 모두 옳고 피해만을 받고 있다고 단정하는 것은 지나친 나이브함이 아닐까?

항상 이런 문제에서는 그런 모호한 정의감이 앞선다.


그 누구도 차별받는 자들을 박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는 없다. 그런 사람은 오히려 욕을 먹지.

하지만 박해받는 자에게 내 파이를 쪼개주라고 말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차별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 중에 그 누구도, 어쩌면 자신 역시 일정 부분은 기득권에 있을지 모르고

그런 파이를 나 스스로 쪼개서 나눠줄테니, 나에게도 쪼개달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던가? 내 기억에는 없었다.


그저 차별을 당하고 있으니 그것은 잘못된 것이고, 다수의 기득권이 양보해야 한다고 주장할 뿐이이지.

그런 것은 세상을 바꾸지도, 잘못된 것을 개선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세상이 바뀌고, 사람들 모두가 좀더 보편적인 선을 추구하는 과정은 긴 설득과 이해, 그리고 본인 스스로도

책임과 의무를 짊어지고 적절한 포기를 수반하여 나아가는 지고의 행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무시하고, 그것이 옳지 않으니 다수가 차별금지법으로 그 선량한 차별을 멈춰라?

여기서 위에 언급한 와치맨의 명대사가 다시 언급된다. 그 차별의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

안타깝게도 이 책에서 조차 그것이 모호하다고는 언급하면서도, 흐지부지 그래도 필요하다는 식으로 말을 흐렸다.


그래서 여러번 정독하며 다양하게 긍정적으로 해석하려 노력하였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책이 정의하는 선량한 차별주의자의 입장에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오해는 하지 말아주길 바란다. 언급했다시피 나 역시도 사회의 구성원으로 스스로 선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차별도 결코 긍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한나 아렌트가 규정한 평범한 악으로 정의된다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일반적인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래서 안타까움을 느꼈다. 당대에 화제가 된 이 책이라면 좀더 그런 상대적인 입장을 양쪽으로 이해하고

그 중간점에서 좀더 세상에 이정표가 될 방향을 제시할 수 있으리라 믿었는데.


그리고 그런 생각을 우리 아이들에게도 기본적인 생각으로 정립해주리라 기대했었는데...

그래서 많이 먹먹한 마음으로 책을 덮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을 많은 사람에게 권하고 싶기는 하다.

사고의 여지는 틀림없이 존재하는 책이다. 긍정하던, 부정하던, 어떤 식으로든 지금 시대를 잠식하고 있는

그 차별이라는 딜레마에 대해 되도록 많은 이들이 생각하고 그에 대해 저마다의 답을 찾기를 바란다.


설령 그것이 내 생각과는 다른 결론을 내릴지라도, 우리는 그 사고를 통해서 파편적이나마

타인의 생각을 이해하고, 내 생각을 정립하고, 거기서 모두가 지향해야 할 보편적인 선의 길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한번쯤 숙고해볼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 사고의 시간과 과정이 어쩌면 우리 시대가 차별금지법보다 더 진정으로 필요한

세상을 바꾸는 해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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