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훌
화재에 꽃샘추위에 난리가 아니었던 시간이 지나고 오랜만에 봄비가 촉촉하게 내리는 주말에
오랫동안 미루어두었던 책을 집어들었다. 제12회 문학동네 청소년문학상 수상작인 훌훌이다.
음... 요즘들어 작품들이 장르나 웹소가 아니더라도, 제목에 어느 정도는 작품의 요지를 밝히는 제목이
대다수인 시대에 드물게 내용이나 주제를 짐작조차 하기 힘든 제목이었다.
그래서 조금 도전해보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고 오랜동안 눈여겨 보다가 봄비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읽어보았다.
뭐랄까, 딱 적절한 조합이었던 것 같다. 빗소리를 들으며 읽지 않았다면 조금 후회했을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유난히도 봄비와 어울리는 작품이었다. 한번 그 서정의 여운을 흥얼거리며 리뷰를 시작해본다.
시작은 주인공 유리가 새로운 담임쌤과 면담을 하고, 조금 범상치 않은 가족 사정에 대해서
말을 흐리는 내용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면담을 마치고 나오기가 무섭게 전화가 온다.
발신자는 할아버지. 내용은... 엄마가 죽었다는 것이다. 자신을 입양하고 내버리고 소식조차 끊겼던 엄마가.
뭔가 곱씹을래야 곱씹을 것도 없는 추억을 뒤적이며 장례를 마치고 유리의 앞에는
생각치도 못한 숙제가 던져진다. 바로 엄마가 남기고 간 엄마가 낳은 친자식, 연우이다.
죄다 엉망진창이다. 돌봐주던 혈연도 아닌 할아버지는 왠지 모르게 병원 냄새를 팍팍 풍기면서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남겨진 마찬가지로 혈육도 아닌 동생은 오롯이 자신의 몫이 된다.
그런 심란한 사정 속에서 안그래도 미쳐버리겠는데, 아이도 왠지 범상치가 않다.
입양되었다가 방치된 자신보다도 뭔가 더 학대 받고 자란 정황이 가득하고 또래보다 미숙하다.
유리의 일상은 미쳐버릴 것 같아진다.
하지만 작중 본인의 말처럼 그러거나 말거나 시간은 흐르기에 그걸 꾸역꾸역 감수하고
우걱우걱 씹어먹으면서 하루하루를 버텨간다. 하지만 세상은 그런 유리에게 좀더 난이도가 높은
상황들을 던져주고 거기서 유리는 멘탈이 나갈 지경에 이른다.
엄마의 죽음에 아직 어린 연우가 연관되어 있다지를 않나, 할아버지는 아픈 것이 뻔히 보이는데도
여전히 벽을 치고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학교에서는 양아치들이 떠도는 소문으로
담임쌤을 모욕하고, 세롭게 알게된 친구 세준이는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이다.
제목처럼, 딱 고등학교 때까지만 여기서 살다가, 졸업하면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혼자 세상에 나가서 자기 힘으로 살고, 친부모를 찾아서 한바탕 쏘아주고 싶은 우리의 주인공 유리는
과연 그 소망을 이룰 수 있을까?
흠... 일단 처음 느낀 감상은 조금 비슷한 느낌이라는 것이었다.
뭐랄까나 근래의 청소년문학상의 수상작은 서로 다른 디테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묘하게도
비슷한 느낌과 톤을 가졌다는 기분이다.
차분하고 잔잔한 여자 주인공, 하지만 가족이나 인간관계로 인한 갈등과 고민,
하지만 그걸 대놓고 폭발시키지는 않고 뭔가 구도자와 같은 느낌으로 감내하거나 혹은 관조하며 버티고
그렇게 정적인 느낌으로 주변의 인물들의 이야기가 얽혀가며 큰 소요가 생기지는 않지만
아무튼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깨닭음이나 위로를 찾고 다시 삶을 이어나가는 그런 느낌...
작품의 필력이나 주제가 서로 다르기에 내용은 상이하더라도 묘하게 비슷한 느낌을
주는 작품들이 각종 문학상의 대세라는 느낌이다. 조금 조악하게 비유를 하자면
같은 카페에 모인 서로 다른 사람들 중에 헤이즐넛 라떼만 마시는 사람들이 연달아 수상하는 느낌?
물론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솔직히 청소년이라는 조건에서 문학이라는 틀에 담을 이야기가
그런 범주에서 벗어나기 힘든 것도 사실이고 실제로 그런 이야기들이 우리 아이들의 이야기니깐.
하지만 조금은 아쉬운 느낌이 그런 비슷한 톤과 결을 가진 아이들의 이야기만 접하다 보면
뭐랄까나 조금 획일적이라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라는 점일 것이다.
물론 예외도 있긴 하다. 지난번에 여기서 소개한 적도 있는 추정경 작가님의
내 이름은 망고에서 나오는 우리의 똘끼 넘치는 주인공 망고같은 경우도 있기는 하지.
하지만 대다수의 아이들이 뭔가 비슷한 느낌의 서정적인 여자 아이들을 보면서
아... 이번에도 그런가보다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 첫인상이었다. 근데 이 작품은 여기서 약간의 변주가 있었다.
그건 의외로 이 작품을 지탱하는 또다른 중심축, 할아버지 부분 때문이었다.
작중에 등장하는 할아버지는 유리를 입양한 엄마의 아버지, 그러니깐 유리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남이다.
그래도 유리를 버린 엄마 대신에 같은 집에서 살며 보호자로 살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 경계는 명확해서 집에서 구분된 공간에 살며 서로 필요하지 않은 대화는 없는 그런 사이다.
얼핏보면 가부장제의 전형적인 군상처럼 보이는 이 할아버지가 유리의 서사와 맞물려가는 부분에서
묘하게 인물의 개성이 단순한 청소년소설의 비슷한 톤이 아니란 느낌을 받았다.
이 할아버지는 묘한 인물이다. 작중에 유리의 생각처럼, 단단하고 흔들리지 않는 마른 고목같은 사람이다.
그래서 얼핏 무관심하고 무뚝뚝하다고 생각하게 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이 사람이
자신의 아픔을 타인에게 넘기지 않으려 애쓰고, 과오와 실책을 후회하며 끝없이 고쳐나가고 반성하려 하는
인고의 철인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그걸 알게 된 순간 할아버지와 유리의 관계도 조금은 달라 보인다.
얼핏 생판 남이라고 생각한 관계지만, 서사가 진행되면서 두 사람은 사실 그 어떤 가족보다도 더 견고한
의미의 가족임을 알게 되고 그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유리는 할아버지에게 자신이 지켜주지 못했고, 제대로 보듬어주지 못한 딸의 대신이었고,
동시에 연우에게 좋은 엄마가 되어주지 못한 엄마의 대신이기도 한 존재로 성장한다.
그래서 작중에서는 혈연이 없는 손녀와 의붓동생이던 유사 가족이 어느새 결말에 다다르면
할아버지의 회한을 담아 지켜낸 딸과 되물림을 하지 않고 아이를 사랑으로 보듬은 엄마로 이어지는
진정한 가족으로서 다시 보이는 마법같은 모습으로 변화한다.
그래서 나는 이 작품을 단순히 유사한 다른 청소년문학의 톤과는 조금 다른 결을 가진 작품이라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이 작품은 단순한 청소년의 고민과 갈등을 다룬 범주를
넘어서는 보편적인 느낌의 가족소설로 보고, 주인공인 유리도 그저 방황하는 청소년이 아닌
가족으로서 스스로를 돌아보고 성장하고 내 가족을 보듬을 수 있게 성장하는 가족 구성원이란 느낌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처음에 애매했던 제목도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유리는 항상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이곳을 훌훌 털어버리고 벗어나기를 바라지만,
어쩌면 진정으로 훌훌 털어버린 것은 마음 속에 남아 있던 넘지 못한 타인과 가족의 선과 그 안에서 망설이던
딸이자 엄마로서의 포지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의 의미가 다양하게 변모하고, 때로는 퇴색하고, 어디서는 부정적인 느낌으로까지 변모하는
각박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내가 아닌 나에게 가장 소중한
타인의 첫번째는 가족이고, 진정한 의미의 가족이란 단순히 혈연만이 아닌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누구나 인연의 무게에 질식하고 싶고, 그래서 때로는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혼자서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날이 있을 것이다. 그런 날이면 한번 이 책을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어쩌면 거기에는 내가 보듬어주지 못한 나의 진정한 가족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지켜주고 있던
늙은 고목과도 같은 울타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닭게 해주는 이야기니깐.
그렇게 봄비 소리를 들으며 오랜만에 느끼는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며 이 작품의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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