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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오늘의 하루

오늘은 오늘의 하루

by 차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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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보물이 많다. 그래서 그것을 우연히 발견하는 것은

삶을 행복으로 채우는 가장 간단한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가끔은 보물이면서도 동시에 멋진 파인 다이닝을 연상하게 만드는 작품을 만나기도 한다.

오늘 소개할 이 작품이 그랬다. 너무나도 잘 구성되고 탄탄한 단편들이

쉴새없이 코스로 이어지며 글로 형용하기 힘든 파인 다이닝의 진수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과연 교보문고 스토리 공모전의 입상작들이라 그런지 그 품격이 남다르다.

오늘은 그런 정찬의 풍미를 여전히 느끼면서 작품 하나하나씩 소개해보려고 한다.


첫번째 이야기, 무지개 너머, 덴마크

청각장애가 진행되는 소년 영현이 마찬가지로 장애로 인해 해체된 가족의 끝자락에 남아

자신을 두고 떠난 형을 추억하고,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아빠와 대립하고,

그러면서도 자신의 이상향일지 모를 덴마크의 정보가 채워진 벽에 새로운 꿈을 담는 이야기다.


시작치고는 의외로 깊은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 동시에 희망의 여운을 남겨주는 작품이었다.

털어버리고 떠난 형과 미련을 두지만 떠나지 못하는 아빠에게 복잡한 감정을 가지면서도

자기 나름대로의 꿈과 희망을 그려내는 절박한 운명에 놓인 영현이의 담담한 독백이 가슴에 닿았다.


코스 요리에서 신선한 채소를 그대로 살리고, 대신 드레싱을 오랜 시간 숙성된 깊은 향이

배여있는 산미가 강한 오일로 장식한 느낌을 준 샐러드와 같은 기분을 느낀 작품이었다.


두번째 이야기, 한여름의 체육 시간

부모님의 갈등과 교실에서의 고립으로 항상 혼자 있는 소녀 여름의 이야기다.

갑자기 나타난 교생선생님에 대한 묘한 감정과 더불어 학교 내 그룹에 끼기 위해 시작된

거짓말의 이야기가 어우러지고, 엄마의 비밀과 두릅남의 정체가 반전으로 터지는 가슴 아린 이야기다.


가벼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아이들이 가지는 또래 집단 내에서의 고독과

집안에서도 있을 곳을 찾지 못하면서 느끼는 상실감이 다다른 골목에서 방황하는 모습을

사실적이면서도 씁쓸하게 잘 그려내고 있었다.


마치 엔초비와 우나기를 써서 묘하게 씁쓸하면서도 진득한 풍미를 만들어낸 카르파초 같은 느낌?

쓴맛도 청춘의 맛이라는 점에서 본 메뉴가 나오기 전에 꼭 음미해야 할 별미란 생각이 들었다.


세번째 이야기, 별비가 내리는 날

근미래, 별비란 이름의 우주폐기물이 일반적인 기상현상이 되고, 덕분에 문명이 정체한 시기에

땀내나는 배달 알바를 하는 소녀, 온비의 이야기다. 별비가 내려 업무가 공친 어느날

같은 동네에 꼬마 아이 누아가 절실히 바라는 선물을 배달하기 위해 퀵보드를 타고 달리는 이야기다.


솔직히 단편집에 넣기 아까운 이야기였다. 풍경의 묘사, 색다른 설정, 인물의 생동감, 신선한 소재.

그 어느 것도 단편으로 끝내기 아깝고 별도의 작품집이 나왔으면 할 정도로 혼자 튀는 걸작이었다.

그리고 상실되어가는 문명의 시대에 아직 남아있는 휴머니즘의 온기도 고품격이었고.


최고급 스테이크와 오랜시간 공들여 만든 그레이비 매쉬드 포테이토가 딸린 메인 디쉬라고 말하고 싶다.

이 메인 디쉬만으로도 코스를 선택한 후회는 없을 것 같은 최고의 만찬이었다.


네번째 이야기, 오늘의 경수

복싱 시합에 나갔다 진탕 깨지고 돌아오고, 우연히 아이돌 기획사에 섭외되서 꿈의 방향을

다시 쓸 생각을 한 경수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다. 뭔가 쉽게 하고 싶은 일이 생기고 거기에

전력을 다해보지만 뭔가 하나하나 만만치가 않다. 정말로 오늘의 경수는 일진이 사납다.


보다가 폭소하게 만든 유일한 작품이었다. 글은 담백하게 쓰여져 있지만 상황상황이 매번 상상하면

배를 잡고 터지게 만드는 사건사고가 폭주하는 경수의 일상을 보면서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마지막에 벌어지는 허무 개그와 빵빵 터져주는 말장난들 까지 생각해보면... 작가님 희극에 재능있으신듯


더없이 만족스러운 디저트라는 생각이다. 포만감에도 불구하고 입가를 개운하게 만들어주는 샤베트와

진한 느낌의 다크 초콜릿이 어우러져서 만족스러운 코스의 막바지를 상큼하게 해준다.


다섯번째 이야기, 꺼지지 않는 빛을 따라

오래 전 외계인을 만나 납치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소녀, 성연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같은 경험을 가진 예희를

우연히 TV에서 보고 7년만에 예희를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난다. 그리고 예희와 재회하여

예전 기억을 떠올리며 그 시절 그곳으로 가는 길을 찾아 나선다. 어쩌면 피치못하게 갈 수 밖에 없는 그 길을.


결말의 작품으로는 조금 당혹스러울 정도로 깊은 무게가 실린 이야기였다.

가정 폭력과 방치, 그리고 저마다의 환경에서 벌어지는 어른에 의한 아이들의 억압과 갈등 속에서

아이들이 어디로 가야할지 길을 모르고 방황하는 모습이 진한 어둠을 드리우고 있었다.


많이 진한 에스프레소라는 느낌이었다. 식후의 마무리로서 나쁘진 않지만 그 진한 풍미에

어쩌면 브랜디보다도 진하게 취할 것 같은 풍미였다. 그래서 더 인상적인 마무리였을지도 모르겠지만.


이렇게 다섯 작품으로 뭔가 예기치 못한 도서관에서 만난 파인 다이닝 코스 요리가 마무리되었다.

놀라운 경험이었다. 흑백요리사의 심사위원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단편의 이야기는 쉽지 않다. 그 짧은 내용 속에 주인공의 상황과 심리, 그리고 서사까지 완벽하게

그려내고 그걸 마무리까지 해야 하니깐. 하지만 그렇기에 단편은 작가의 놀라운 고뇌와 필력이 담긴

진득한 페이소스가 될 수 밖에 없고, 그 이야기들은 말 그대로 파인 다이닝이라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리뷰를 읽고 이 책을 접한 분들에게도 한번 색다른 방식으로 권해주고 싶다.

음식의 정찬으로 비유한 이 멋드러진 코스 요리를 통해 주말 저녁 마음의 양식으로 포식해 보는 것을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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