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를 아는 사람들
책의 인연이라는 것은 거치다 보면 참 흥미롭다.
어쩌다 보니 전혀 생각치도 못하게 만나게 되는 이야기가 있으니 말이다.
오늘 소개할 이 작품이 딱 그런 느낌이었다.
어떻게 건너건너 소문을 통해 듣게 된 책에 대해서, 사실 내 취향과는 무관하고 쓰려는 분야와도
거리가 멀었지만 이상하게 끌리는 기분이 들어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예상 밖의 재미가 있었다.
오늘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들거라 생각한 옴니버스 스릴러의 혈향에 한번 취해보도록 하자.
작품의 시작은 한 엄마가 실종된 아이로 인해 울부짖으면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항상 모범생에 우등생이었던 아이는 뜬금없이 학원 사감 여선생과 사라지고, 그 사실에 대해 언론은 수근거린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매듭지어지기도 전에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는데,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문창과를 다니는 대학생 주주이다.
그녀는 문창과 합평 시간에 들은 지독한 비평과 더불어 진정성이 없다는 이야기에 좌절하고,
친구라는 주제에 대해서 대체 무슨 진정성을 담아야 하는지 고민한다.
그런던 차에 떠오른 기억, 그건 어렸을 때 잠시 본 적이 있던 친구 슬지에게서 왔던 메일이었다.
아직 고향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며 언젠가 만나고 싶다는 안부를 담은 메일.
꺼림칙한 기억을 가진 친구였지만, 당장 수업이 절박한 주주는 그녀를 만나러 고향에 내려간다.
그리고 재회한 슬지는 그녀를 반갑게 맞이하지만, 주주는 여전히 그녀가 얕보이고 달갑지 않다.
그리고 그리 좋은 기억이 없는 고향의 시골 풍경도 마음에 들지 않고.
또 슬지와 이야기하면서, 그녀는 자신을 친구라 말하지만, 사실 자신이 그녀의 가해자였다는 진실을
떠올리며 복잡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
그러던 차에 노을이 예쁜 산으로 가자는 슬지의 말에 따라나선 주주는 가는 길이 뭔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닭고, 슬지와의 대화에서 묘하게 걸리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그것은 예전에 두 사람 사이에 산에서 있었던 잊어버린 기억을 수면 위로 드러낸다.
과연 주주와 슬지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고, 슬지는 왜 그녀를 이곳으로 부른 것일까?
그 의문이 풀리기도 전에 이야기는 차례로 다음 사람에게 넘어간다.
바로 슬지를 아는 사람들의 진술과도 같은 이야기가 십여편이 넘게 펼쳐진다.
성희롱을 하는 사장에게 분노하던 직원에게 복어 독으로 살인 누명을 씌우는 것을 알려주는 슬지.
분홍색을 좋아하던 의류 회사 과장님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의문의 사고들과 관련된 슬지.
연인의 배신으로 홧김에 간 여행지에서 만나서 복수할 방법을 알려주는 슬지.
버스정류장에서 우연히 주은 노트에서 발견된 한 선배를 독점하기 위해 끔찍한 일을 저지르려는 슬지.
모두 슬지라는 한 인물에게서 나온 상상조차 하기 힘든 섬뜩한 이야기가 사람들의 입을 빌어 증언된다.
과연 그녀의 정체는 무엇이고, 어떤 목적을 위해 이런 일들을 벌이는 것일까?
그 모든 의문의 귀결이 풀렸을 때, 맨처음 나온 남학생의 실종 사건의 진상에 다다른다.
휴우... 뭔가 오랜만에 제대로 긴장감을 가지고 읽은 작품이란 느낌이다.
우리나라에 이런 옴니버스 스릴러물이 실존하다니. 마치 사막에서 시원한 밀크쉐이크를 발견한 기분이고.
덕분에 읽으면서 여러가지로 흥미로운 점이 많았던 작품이다.
먼저 신선한 구성에 감탄했다.
사실 스릴러는 분량을 많이 요구하는 서사다. 인물의 성격과 인생관, 사건을 발생시킬 환경과 동기,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진행 과정까지... 일련의 과정이 책한권을 뚝딱 잡아먹기 딱 좋다.
그래서 이 작품의 구성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는 무려 10여가지가 넘는 사건들이
10페이지 안팎에서 집중적이고 요점만 확실하게 부각되어 하나의 사건을 생생하게 담아낸다.
와... 그래서 이 책 한권으로 무려 10여개가 넘는 그것이 알고 싶다를 감상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이런 구성이 우리나라에 있다는 것이 너무 반갑고 신기했다.
자칫 복잡해지기 쉬운 스릴러의 서사를 이렇게 간단하게 정제해서 뚝딱! 10여편의 종합선물세트를
만들 수 있는 역량이라니. 작가님의 필력에 감탄이 나왔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주인공에게 감탄했다.
강슬지라는 이 작품의 주인공. 와... 어떤 의미로는 한니발 렉터 뺨치는 아가씨 아닐까?
괴상하게 사람 가죽이나 벗기고 체포되는 대신에 그 많은 짓을 벌이고도 자유롭다는 점에서 1승 아닐까?
작중에서는 적절히 매력적인 외모지만 이래저래 사회적으로는 무시당하는 입장에 처한
엉뚱하면서도 소름돋는... 하지만 그것이 때로는 치명적인 매력으로 발산되는 강슬지라는 캐릭터가 너무 좋았다.
참 보기 드문 인물 구성이란 생각이 든다. 작가의 최애라면 어쩔 수 없이 이것저것 미화가 들어갈 수 밖에 없고,
서사를 위해 희생된다면 이래저래 고난을 겪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이런 작품의 주인공은 겁나 대단하지만 억지 까임을 당하는 금잔디 유형이 흔해지기 쉽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런 과잉을 철저하게 배제되고 지극히 현실의 입맛에 맞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이웃들 속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해 보이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포식자를 제대로 그려내고 있었다.
처음에는 혐오감이 들면서도 마지막에는 어쩔 수 없이 응원하고 공감하게 될 정도로.
그래서 참 안타깝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캐릭터 여기서 묻히기는 참 아까운데...
언젠가 시리즈로 등장해서 세상을 소름돋게 만드는 신개념 빌런으로 다시 볼 수 있음 좋겠다 싶었더랬다.
마지막으로 이야기의 소재들에 대해서 감탄했다.
다른 보편적인 작품들과 다르게 여기서는 살의의 방향이 결코 선악의 이분법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이 좋아하던 상대를 차지하기 위해 그의 연인을 제거하려는 본질적인 욕망이나,
누군가에게 사랑받기 위해서 자신의 치명적인 것을 노출하는 공포스러운 고백이나,
타당하게 타인을 죽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다른 방향으로 돌려 자신의 이득으로 승화하거나...
결코 정의와 인륜에 의하지 않은, 더없이 인간 본질의 욕망에 기반한 사건들로 점철되어 있다.
그래서 그 동기들은 오히려 설득력과 공감대를 불러일으키고, 읽는 이로 하여금 빠져들게 만든다.
아! 나도 누가 저렇게 해줬으면. 방법만 알려준다면. 아니, 아예 대신해준다는데 말리지만 않는다면.
그런 생각을 한번도 하지 않고 이 책을 덮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려나?
물론 보편적으로야 세상의 정의를 토대로 판단하는 것이 정상일 것이다.
그렇기에 이런 창작의 영역에서는 때로는 그런 보편적인 진리를 발로 걷어차는 과감한 이야기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는 점을 용인하고 그에 대해 찬사를 보낼수도 있는거 아닐까 싶다.
그런 연유들로 인해 우연히 집어든 이 책의 만족도는 최상이었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최근에 리뷰했던 러브:트랙을 봐서 그런지, 이 시리즈도 그런 단막극 10부작의
형태로 영상화된다면 너무 매혹적일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
컨텐츠의 기술은 발전하지만, 다양성은 오히려 제한적이고, 이런 매혹적인 소재가
묻혀버리는 안타까운 현실에 탄식하며 언젠가 여기서 이어지는 다음 이야기를 볼 날이 오기를 마음 속으로
조용히 고대하며 오늘의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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