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머시 : 90분
주말 저녁에 별 생각없이 보내려다가, 갑자기 번개로 영화를 보게 되었다.
고른 작품은 전부터 소문은 들어서 기대하고 있었지만, 약간은 반신반의하던 작품 노머시 : 90분이었다.
이제 AI의 시대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지금의 시대에,
소름 돋으면서도 남의 일로 치부할 수 없는 탄탄한 서사의 웰메이드
추리SF스릴러에 오늘 한번 빠져보도록 하자.
이야기의 시작은 주인공 크리스 레이븐 형사가 머시 법정에 결박된 상태로
AI 판사 매덕스의 기소를 받으며 놀라면서 시작하게 된다. 그의 죄명은 살인.
자신의 아내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어 법정에 끌려온 것이다.
시대는 가까운 미래, 너무나도 넘쳐나는 범죄와 길어지는 법정 다툼에 질려버린 사법 체계는
신속하게 90분 안에 재판을 마무리하는 문자 그대로 자비없는 AI 법정을 만들게 된다.
예전에 범죄자들의 손에 파트너를 잃은 크리스는 그런 AI 법정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법정에 피고로 재판을 받게 된 것이다.
일단 기소된 크리스는 만취해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매덕스는
90분의 카운트다운을 시작하며 그 시간 안에 무죄라면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라 요구한다.
크리스는 그 말도 안되는 제한 시간에 경악하며, 더듬더듬 재판 시간 중에는 무제한으로
생기는 도시의 모든 기록을 열람할 권리를 가지고 사건을 수사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파고들면 들수록 모든 증거는 범인이 자신이라고 지목한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아내의 시신을 목격한 딸마저도 아빠의 결백을 믿지 못하며 울부짖는 상황에 시간은 흘러간다.
그러다 고생 끝에 아내 역시도 자신이 알지 못했던 외도의 정황이 있음을 알아내고,
새로운 파트너 잭의 도움으로 외도 상대를 알아내고 도망치는 그를 검거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유죄 확률은 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더 강력한 동기만 확인된다.
거기다 체포한 외도 상대는 사건과 무관하다는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고.
그래서 크리스는 절망한다. 그리고 항상 알콜 중독으로 가족을 돌보지 못한 자신에게
이런 결과는 마땅하고 어쩌면 자신이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이르게 된다.
하지만 AI 판사 매덕스는 그 와중에도 감정에 호소하지 말고 자백 역시도
증거를 토대로 하라고 요구하고, 그 요구에 크리스는 고통스러워 하면서도 사건의 수사를 이어간다.
그러면서 발견되는 또 다른 아내의 의혹. 아내의 직장과 관련된 수상한 기록을 확인하고,
그 사실을 토대로 크리스는 침착하게 사건의 진실을 향해 카운트가 돌아가는 와중에 차근차근 접근한다.
과연 아내를 죽이고 크리스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운 범인의 정체는 누구일까?
그리고 AI 판사 매덕스는 과연 모든 사실만을 토대로 완벽하게 공정한 판결을 내릴 수 있을까?
생과 사가 가리는 90분의 시간 속에 AI와 인간의 숨가쁜 두뇌 싸움이 시작된다.
영화를 보고 나서 나온 감상은... 와 대박. 단언컨데 근 몇년 사이에 봤던 영화 중에서
가히 이 작품을 최고라고 꼽고 싶었다.
아니... 어떻게 이런 말도 안되는 레벨의 치밀하고 군더더기 없고, 모두가 두려워하는 소재를
90분이란 시간 속에 함축적으로 담아 불후의 걸작을 만들어 낼 수가 있을까?
근래에 진부하다는 소리가 많아진 헐리우드의 스토리텔링은 여전히 명불허전임을 확인하는 것 같았다.
사실 지금의 시대는 누가 뭐래도 부정하기 힘든 AI의 시대다.
세상의 모든 테크노 마피아들은 모든 자금과 에너지와 인력을 그곳에 투입하여 사활을 걸고 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마저도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된 인공지능의 존재는 이제는
SF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옆에 다가온 리얼 스토리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대하는 인간의 수준은... 아직도 여러가지로 의문을 보여준다.
그것을 마치 신인것처럼 추종하고 따르고 순종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절대로 부정하고 그 자체를 인간을 위협하는 적으로 여기는 자들도 있고...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여기면서도 내심 두려워하는 대다수도 있다.
공교로운 상황이다. 인간을 넘어서는 인공지능의 등장을 대하는 인간의 반응은,
더없이 단순하고 어리석고 혼란스럽기 그지 없으니 말이다.
그런 불안한 그림자를 드리우는 미래에 인간은 AI에게 종속될 수 밖에 없는 것일까?
그 의문에 대해 해답이자 동시에 고민할 거리를 던져주는 것이 바로 이 작품이란 생각이 든다.
다른 AI의 문제를 다룬 작품들이 어설프게 AI의 한계를 임의로 설정하거나,
혹은 지독하게 유아적인 발상으로 도덕적인 논점을 들어 부정하는 것들을 종종 봤더랬다.
뭐...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윌 스미스가 출연한 영화 아이 로봇에서 주인공이
로봇에게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작곡할 수 있냐고 묻는 건 유명한 밈일테니깐.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오히려 그런 추상적이고 억지스러운 주장을 제시하지 않는다.
팩트를 판단하고, 모든 정보가 제공된다는 전제 하에서 AI는 완벽하게 공정하다는 패러다임을
부정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문제가 있다는 화두를 던진다.
내용의 스포가 될 수 있기에 차마 밝힐 수는 없지만, 작중에서 언급되는 치명적이면서도
수긍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을 초월한 지적 존재가 범할 수 있는 오류.
그것을 멋지게 제시하고 동시에 그에 대해 생각할 여지를 남겼다는 점에서 나는 이 작품을
AI를 기반으로 한 SF의 한 방점을 꽂는 걸작으로 기억하고 싶다.
그건 마치, 예전에 아이작 아지모프의 작품, 강철 도시에서 느꼈던 소름돋는 반전 이후
처음 겪는 비슷한 느낌이었더랬다. 와... 대체 어떻게 이 정도로 치밀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까?
이야기를 쓰고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시대는 나날이 어렵고 복잡함을 느낀다.
단순한 지식의 부족함이 아니라, 지혜의 방향성을 가늠하기 힘든 시대인 것이다.
그런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거기에 매몰되거나 휩쓸리지 않고, 내가 인간이고 그렇기에
스스로 생각할 수 있음을 자각하고 다지게 만드는 이야기에... 어찌 매료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래서 너무나 좋아하던 배우, 크리스 프랫과 레베카 페르구슨의 열연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서 가장 눈을 뗄 수 없었던 것은 그 완벽한 서사를 담은 스토리였다고 말하고 싶다.
언젠가 우리는 도태될지도 모른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항상 그렇듯이.
하지만 그게 오늘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직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영화에 나온 이야기는 아니지만, 나는 내 마음대로 떠올린 위에 저 구절...
이 영화에 의미를 함축적으로 담은 저 글귀에 이 영화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안타깝게도... 왠지 이 영화가 설날 극장가에서 대박을 칠 영화는 아니라는 점에는 동의한다.
묘하게 좁은 공간과 이런 장르의 선호가 높지 않은 극장가의 사정을 모르지는 않으니깐.
하지만 그렇기에 한번쯤 이 리뷰를 보는 분들에게라도 권하고 싶다.
내가 아직 생각하는 인간이라면, 한번 크리스와 함께 90분 동안 개정될 법정의 피고인으로
출석해볼 것을 말이다.
많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을 장담하며
오늘 감동에 벅찬 여운을 진정하려 애쓰며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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