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구의 삶
우연치 않은 기회로 이금이 작가님의 작품 허구의 삶을 읽게 되었다.
그리고 읽어본 후기는... 이거 대체 뭐지?
비꼬는 의미가 아니라 진지하고 잔잔하게 충격적인 작품이어서 저런 반응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작품의 내용을 간단히 설명하면, 허구는 가짜라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등장인물의 이름이다.
주인공이자 관찰자인 상만은 학창시절 제천에서 친구 허구를 만나게 되고
허구를 통해서 자신이 알지 못했던 삶의 분기점과 평행세계에 대한 가능성을 접하고
동시에 현실의 삶을 살아가며 쭉 허구의 인생의 관찰자로서 지켜보는 내용이다.
이렇게 설명하면 대체 뭔 소린지 모르겠지만 실제로 내용이 그렇다.
이 작품은 주인공 상만의 시점에서 본 허구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고, 허구가 종종 신비한 느낌으로
쓰는 글에서 여행자 K라는 허구의 또다른 평행세계의 모습을 접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그래서, 얼핏 SF 장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의외로 이 작품은 SF적인 소재를 사용하면서도
현실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꾸덕꾸덕한 현실과 맞닿은 고된 삶의 환상향 같은 느낌으로 SF가
킥처럼 사용되는 느낌이다.
사실, 읽어보면서 당황스러운 요소가 많았다. 먼저 위에서 언급한 묘하게 SF인지 아니면
인물의 서술트릭인지 알수 없게 만드는 전개에도 당황스러웠고.
그리고, 오랜만에 접하는 상당히 오래된 느낌의 문체와 지금 세대에게는 생소할 시대의 풍경에 놀랐다.
우와... 지금 시대에 쌀집자전거와 제천 의림지 데이트라니...
이런 느낌은 아이를 키우면서 다시 독서와 글쓰기를 접하기 전에, 그것도 아주 한참 전에
상만과 같은 학창시절에 읽었던 글들에서 익숙하던 묘사였는데.
그런데 AI와 모바일폰이 필수인 시대에 이런 고풍스러운 글을 다시 읽게 되리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러면서 참 시대의 변화에 놀라웠다. 예전에는 너무나 익숙했던 배경과 문체가 이제는
생소한 장르로 치부되는 시대를 나는 살고 있다는 생각에 아연함이 느껴졌다.
세월 참 빠르네. 그러고 보니, 내가 쓰는 글마저도 이제는 예전 문체와는 많이 멀어졌구나.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작품이 결코 고루하지는 않다. 어쩌면 작가님의 특유의 필력에서 배여나오는
시대를 아우르는 묵직한 서사와 그것을 담담하게 관찰해나가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어쩌면 예전에 잃어버린 그리움과 재미를 다시 찾은 느낌마저 드는 그런 신선함이 있는 글이었다.
그리고, 작품의 반전도 대단했다. 작중에 몇번 스치듯이 언급되는 관찰자 상만이 말하지 않은
비밀이 마지막에 밝혀지고, 그것이 허구의 이야기와 연결고리를 가지면서 아마도 이 책을 읽은 모든 독자는
카타르시스를 느꼈으리라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이 작품은 상당히 묵직한, 와인으로 비유하자면 최고의 빈티지에 생산된 블렌딩을
오랜 시간 공들여 보관한 다음, 그것을 디캔터에 담아내자 향기만으로도 압도하는 그런 느낌을 주는 작품이었다.
그래서... 여담이자만 아직 아이들에게는 좀 먼 이야기라는 것이 안타까웠고.
어째서 문자로 안보내서 약속이 엇갈리고, 쌀을 새벽배송으로 안시키는지 의아해하는
아이들에게는 조금 이해시키기 어려웠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웃픈 기분과 오랜만에 맛본 해묵은 고풍스러운 문체에 취해보며 리뷰를 마친다.
#허구의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