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이커
가끔 책을 읽다보면 의도한 바가 아닌데, 기묘하게 비슷한 느낌을 주는 책을
연달아 읽게 되는 경우가 있다. 바로 전에 소개한 허구의 삶을 읽고 나서, 바로 이어서 읽은
이번에 소개할 작품 셰이커가 그랬다.
사실, 이 두 작품을 하나의 범주에 묶는 것은 좀 무리수일지도 모른다.
배경도 그렇고, 문체도 그렇고, 주인공들의 분위기도 그렇고 여러모로 두 작품은 상당히
다른 색채를 띄는 작품이니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두 작품을 보면서 비슷한 느낌을 느낀 것은, 둘다 성인이 된 이후
청소년기를 회상하며 진행되는 이야기고, 그 과정에서 어쩌면 바뀌었을지 모를 갈림길을 두고 고민하는
것에서 비슷한 향기를 느꼈던 것이다.
흥미로운 기분이었다. 완연하게 다른 색채의 두 작품이 비슷한 큰 그림에서 서로 다른
느낌을 보여준다는 사실이. 마치, 요즘 유행하는 흑백요리사에서 같은 재료로 흑과 백의 두 요리사가
서로 다른 느낌의 음식을 내오고 그걸 맛보는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시작부터 유쾌했던 이 작품 셰이커에 대해서도 즐겁게 리뷰해보고자 한다.
내용은 간단하다. 성년이 된 주인공, 나우. 연인인 하제와 먼저 세상을 떠난 하제의 전남친이자 자신의
절친인 이내를 두고 항상 후회를 안고 살아간다.
그러다 우연히 들린 칵테일바에서 만난 바텐더에게서 받은 칵테일을 마시고
나우는 자신이 돌이킬 수 없었던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가게 된다.
어찌보면 상당히 모범적인 타임슬립물의 구성이다. 허구의 삶에서 미묘하게 여행자 K라는
형식을 빌리는 것이 오히려 참신할 정도로 익숙하게 사용된 방식이기도 하고.
그리고, 그렇게 돌아간 시간 속에서 아무리 발버둥쳐도 과거의 일을 바꾸기는 쉽지 않고
그것에 고군분투하거나 절망하는 전개도 정석적이고.
그래서, 장르적인 관점에서 보면 비교적 클래식한 작품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 매력이 바래지 않는 것은 역시 작품이 가지는 청소년들의 청춘의 청량감과
그 시절의 추억에 대한 그리움을 수준높은 필력으로 잘 그려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인이 되어서 모든 일에 망설임이 많은 32세와는 달리 질풍노도의 시기 15세에
바를 뛰어넘어 달려들 것 같은 소년의 혈기에 쓴웃음을 짓게하고,
반대로 짝사랑하는 소녀 앞에서는 자신이 거기 있으면 안되는 것을 알면서도 멀어지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순수함을 수려한 필체로 감각있게 그려나가고 있다.
그래서, 사실 이 작품을 보면서 느낀 감상은 타임슬립물에서 나올 트릭이나 패러독스에 대한
추리보다는 오히려 그 시절 두 소년과 한 소녀가 만들어가는 순수하지만
가슴시린 청춘의 이야기가 더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 같았다. 오! 녹색으로 빛나는 그 시절이여.
그래서 작가님에게도 다시 한번 감동했다. 이희영 작가님은 청소년 작품에서 심도 깊은 소재를
잘 쓰시면서도 동시에 청소년들의 알콩달콩한 풍경의 묘사에도 발군이시다.
그건 작가님의 전작 여름의 귤을 좋아하세요에서도 유감없이 맛볼 수 있었던 바이다.
그리고 방금 말했듯이 이번 작품에서도 심도 깊은 이야기에 대한 몰입은 유감없이 선보인다.
읽는 독자들은 주인공 나우의 선택과 갈등, 그리고 이야기가 깊어지면서 점점 드러나는
이 작품의 마지막 반전을 보면서 깊은 감동과 동시에 탄식을 내뱉으리라 생각한다.
결코, 식상하지 않은, 그렇지만 너무 무겁지도 않은,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오히려 어른들에게 더 깊은 감동과 그 시절에 회상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의 흐름 속에서 잠시나마
잊고 있었던 그 시절의 추억을 느낄 수 있기에, 나는 이 작품을 작가님의 또다른 대표작으로 추천하고 싶다.
그리고, 소소하게나마 마찬가지로 글을 쓰고 싶은 지망생으로서
이제는 식상하다는 소리마저 들리는 타임슬립 소재를 멋진 붓질과 공간 디자인으로 결코 진부하지 않은
것으로 만들어내는 장인의 솜씨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오늘을 살아가는 고된 청춘들, 힘겨운 시간을 보내며 과거를 잊고 사는 어른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그리고 오늘 저녁에 어느 골목길을 걸어가다가 우연히 향기로운 무알콜 칵테일을
반짝이는 바가 있다면 한번 발걸음을 돌려보기도 권하고 싶고. 청춘의 눈동자에 건배하며 리뷰를 마친다.
#셰이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