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백 년째 열다섯
아이들의 책을 고르다 보면 작품이 미묘한 경계를 두고 분류되곤 한다.
문학적 깊이와 성숙한 서사를 가진 작품과 즐겁게 읽고 시종일관 유쾌한 서사를 가진 작품이다.
솔직히 둘다 좋다고 생각한다. 책도 음식처럼 깊이를 가진 맛과 가볍고 유쾌한 맛 둘다 필요한 법이니깐.
그런데 그 두가지가 하나의 작품에 공존한다면 그건 뭐라고 불러야 할까?
아마 불후의 명작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지 않을까? 오늘 소개할 작품 오백 년째 열다섯이 딱 그런 작품이다.
작품을 쓰신 김혜정 작가님은 전작인 헌터걸을 통해 처음 만나게 되었다.
큰 특색이 없어 보이는 작품을 아이들이 정신없이 읽고, 곧바로 후속 이야기를 읽게 해달라는 말을 듣고
대체 무슨 작품이길래 그러나 했었고, 어떤 작가님이신가 했다.
그리고 작가님을 이 작품을 통해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이제는 장안의 화제이자 베스트셀러로 등극한 지금에서야 겨우 리뷰를 하게 되는 것도 좀 그렇지만
그래도 그 재미의 여운을 느끼며 떠오른 감상을 적어보려고 한다.
내용을 간략히 적어보자면 이야기는 단군신화를 기반으로 한다.
주인공 소녀 가을은 오백년전 야호인 령에게 여우구슬을 받아 엄마와 할머니와 같이 오백년간
죽지 않고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가을이는 열다섯살이지만, 세상은 빠르게 시간이 흘러가고
그 기나긴 오백년간의 세월이 흐른 현대에 오랜 시간 대립해온 여우의 일족인 야호족과 호랑이의 일족인
호랑족의 대결이 긴장감을 높여가지만, 가을이는 그보다는 홀로 시간의 흐름 속에 남겨진
자신의 삶을 한스러워하고 영원히 같이 자매처럼 남겨진 엄마와 할머니에게 불만이 더 크다.
하지만 가을이의 그런 오백년이 넘어가는 사춘기는 그렇게 만만하지 않으니
주변에 상황들은 심상치 않은 모습으로 돌아가고, 가을이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그런 종족의 운명을
건 싸움에 중심에 서게 된다. 과연 가을이는 이 상황을 해결하고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뭐 내용은 짤막하게 요약했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유쾌발랄하면서도 나름 얼마나
가을이가 난감한 상황에서 구르게 될지 짐작이 갈 것이다.
사실 너무 반칙같은 작품이다. 왜냐하면 처음 언급했던 것처럼, 생각보다 깊은 문학적인 서사를
담고 있으면서도, 지루하거나 딱딱하지 않게 유쾌발랄한 통통 튀는 트렌드를 충분히 담고 있는데다가
치명적으로 이야기가 너무 재밌어. 그냥 읽는 즉시 술술 읽히는 책이 바로 이런 예시일 것이다.
도서 리뷰에서 엄마랑 아이가 서로 먼저 읽겠다고 싸웠다는 말이 괜한 마케팅이 아니라
사실이라는 것을 읽어본 입장에서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아이들의 섬세한 감수성도 잘 어루만져 주었다. 무려 오백년을 열다섯 지랄발광
사춘기를 보내고 있는 가을이의 불안하면서도 예민하고, 그러면서도 동시에 성숙해야 하는 내면의 모습을
과장되지 않고 흥미롭게 풀어가고 있어 그 자체로 아이의 성장담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작품의 최고의 킬포인트는 역시 엄마랑 할머니가 젊은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자매인 척 하며
같이 학교를 다닌다는 점일 것이다. 와... 대체 어떻게 이런 팍 터지는 아이디어를 떠올리셨을까?
세상의 모든 딸들에게 엄마는 최고의 친구이자 동시에 가장 짜증나는 존재일 것이다.
그래서 모녀의 아옹다옹은 여자 아이가 주인공인 청소년 소설에 필수로 나올 내용인데,
그걸 완전히 클리셰를 틀어서 같은 나이로 보이는 자매로 같이 학교를 다니는 설정을 하다니.
보고선 처음부터 얼마나 웃음이 터졌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이 책을 본 모든 여자 아이들이 처음 장면을 보며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면서 보기 시작했으리란 생각에 웃음을 참기 어려웠다.
그래서, 뭔가 흠을 잡기 힘든 독서에 익숙치 않은 비기너들도 얼마든지 쉽게 집어서
완독의 성취를 느낄 수 있을 작품이라 추천하고 싶다. 그러니 첫눈이 폭설로 내린 황당한 겨울날
따뜻한 침대에 누워서 한번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분명 동화처럼 펼쳐지는 흥미로운 이야기에 책을 내려놓기가 어려울 것을 미리 주의하길 바라며.
P.S 1 흠잡기 어려울 정도로 재밌는 작품이긴 한데, 약간의 아쉬움도 있기는 했다.
너무 야호의 일이 스토리의 메인이 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3대 모녀의 좌충우돌이나 5백년을
살아오며 생긴 시간의 에피소드를 더 채워넣었으면 좀더 유쾌한 내용이 아닐까 싶은데.
뭐, 아직 1권 밖에 안 읽었으니 후속편에서 그런 내용이 좀더 나오기를 기대해본다.
P.S 2 근데 이렇게 재밌었는데 의외로 우리 애들은 생각보다 관심이 없어서 놀랐다.
아니, 헌터걸은 그렇게 재밌게 읽고선 왜? 아이들의 취향은 항상 알다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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