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란 질감

2018.06.08

by 종이소리
이런 골목이 살았습니다.

이런 골목이었어요.


누군가에게는 그저 낡은 동네의 풍경일지 모르나, 여전히 숨 쉬며 뛰는 맥박이 느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아마도 산자락을 따라 층층이 쌓아 올린 삶의 터전들이, 저마다 다른 높이의 지붕을 머리에 이고 있는 그 정겨운 풍경 때문일 것이다.


회색 슬레이트 지붕부터 붉은 벽돌 건물의 옥상, 그리고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파란색 물탱크까지.


이들은 서로의 조망을 가로막기보다 겹겹이 포개어지며 하나의 거대한 삶의 지도를 그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저마다의 독특한 건축 형태를 으스대며, 부여받은 그 시간을 오롯이 살다 떠났다.


어쩌면 그 시간은 누군가에게 고되고 절박한 삶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좁은 골목과 가파른 지붕 아래 세상 하나뿐인 '고유한 삶'이 흐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찍어낸 듯 매끄러운 현대의 건축물은 결코 가질 수 없는, 세월의 풍파를 견뎌낸 이들만이 지을 수 있는 '유일한 표정'이 이 골목에도 분명 머물렀다는 방증이다.


‘매끈함’과 ‘규격화’에 집중된 현대 도시화의 획일적 풍경인 아파트의 단정한 품위와는 다른 그림. 이 낡은 풍경 속에서 뭉클한 감동과 함께 찾아낸 진짜 보물은, ‘사람의 손때’, ‘처지가 낳은 임시방편’, 그리고 ‘어쩔 수 없는 그들만의 사정’을 품어 안은 “정(情)”이었다.


​비가 새지 않도록 덧댄 함석판의 투박함, 한 뼘이라도 더 넓게 사용하기 위해 가파르게 꺾인 옥상 계단, 집집마다 다른 용량으로 놓인 파란 물탱크들.


이 모든 것들은 이곳의 거주자들이 각자의 삶을 지탱하기 위해 기울인 부단한 노력의 증거이자, 생존을 향한 숭고한 기록이 아닐까.


결핍을 가리기보다 삶의 무게를 정직하게 드러낸 풍경. 어쩌면 우리가 진정 그리워하는 것은 세련된 조형미가 아니라, 서로의 사정을 지붕으로 덮어주고 보듬어주던 그 투박한 ‘정’의 질감일지도 모른다.


그 처절하고도 간절한 삶의 흔적들 앞에서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내 이웃의 지혜로운 이야기를 가만히 들으며 마음으로 인사를 건넸다.


"수고 많으셨어요. "


고개를 들어 다시 마주하니 ​지붕 너머로 보이는 산의 능선과 그 아래로 펼쳐진 고층 아파트의 대비가 긴 숨을 토하게 했다.


산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고, 도시는 그 발치에서 끊임없이 변모해 왔다. 낡은 가옥들과 저 멀리 보이는 최신식 건축물 사이의 공존을 보며 생각했다.


그리고 재개발과 재생이라는 거창한 담론 속에서 우리가 정작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낡은 지붕들 아래에서 수십 년간 이어져 온 '이웃의 온도'와 '삶의 서사'가 아닐까..라는 조심스러운 물음표 하나를 걸어 두었다. 낡은 벽면과 얽힌 전선들은 결코 지저분한 것이 아니라, 도시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모세혈관이라는 느낌표와 함께.


'오래된 것의 가치'를 새삼 깨닫는 순간이었다. ​이 소박한 지붕들의 연대(連帶)가 머지않아 사라질 풍경일지라도, 그 안에 깃든 사람의 온기만큼은 우리 도시의 기억 속에 깊이 각인되길 바라는 기도도 함께.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