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6.04
재개발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 골목을 걷다 보면 시간의 흐름이 잠시 멈춘 듯한 착각에 빠지곤 한다. 누군가의 손때가 묻은 담벼락, 담쟁이넝쿨이 감싸 안은 낡은 대문들. 그 사이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다가 담벼락 아래,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그릇 더미를 만났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버려진 '폐기물'이겠지만, 내 눈에는 마치 길을 잃은 작은 생명들처럼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생각보다 훨씬 깨끗했다.
십장생을 닮은 사슴과 소나무, 화려한 꽃무늬가 그려진 그릇들은 세월의 흔적은 비껴간 채 여전히 생생한 색감을 뽐내고 있었다.
어느 댁의 찬장에 소중히 보관되었던 '귀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매일 아침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갓 지은 밥과 찬을 담아내던, 가장 충실한 일상의 동반자였을까?
조선 민예의 아름다움을 극찬했던 야나기 무네요시는 그의 저서 《공예의 길》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의 하루는
그들 속에 파묻혀 저문다.
기물이기는 하나
이미 한 집안의
식구들인 것이다.
나를 찾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것들과 만나지 않고서는
돌아갈 수가 없다."
그가 말한 '그것들'이란 찻잔, 주전자, 그릇, 수저와 같은 평범한 도구들이다. 하지만 그 평범한 것들이 모여 한 사람의 하루를 구성하고, 결국 한 인생의 온기를 이루고 집안에서 함께 살아간다는 의미겠다.
식탁 위에 오르내리던 이 그릇들은 단순히 음식을 담는 도구가 아니었을 것이다. 가족의 안부를 묻는 대화 속에 있었을 것이고, 누군가의 생일을 축하하는 설렘 속에 있었을 것이며, 때로는 홀로 삼키는 고단한 저녁 식사의 유일한 목격자였을지도 모른다.
골목에 내놓아진 그릇들을 보며 그 '식구'였던 시간들을 상상했다. 기물(器物)로서의 쓰임을 다하고 버려지는 순간, 그릇이 담고 있던 삶의 기억들도 함께 휘발되는 것만 같아 뭉클했다.
현대 사회에서 물건은 너무나 쉽게 대체되고 버려진다. 하지만 물건에 깃든 '시간'만큼은 대체될 수 없는 추억이다.
그릇들이 속삭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쪼그리고 앉았다. "나도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존재였다"라고 말하는 듯한 그 선명한 무늬들.
무심히 지나칠 수 없었던 이유는 그릇이 품고 있던 그 정직한 '생활의 무늬' 때문이었다.
자주 잊고 살았구나.. 우리를 지탱하는 것은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 매일 손에 닿는 수저와 그릇, 매일 앉는 의자 같은 소박한 '식구'들이라는 사실을.
사라져 가고 있는 낡은 골목에서 발견한 누군가의 식구가 물음표를 건넨다. 당신의 하루를 채우는 '식구'들에게 당신은 어떤 인사를 건네고 있느냐고.
길가에 놓인 그릇들을 조심스레 마음속에 담았다. 버려진 자리가 아니라,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다시 빛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쓰임을 다했다는 것은 곧 누군가의 삶을 온전히 지켜냈다는 훈훈일 테다. 오늘 저녁, 내 식탁 위의 그릇을 조금 더 따뜻한 눈으로 바라봐야겠다. 그들은 이미 나의 하루를 함께 마감해 주는 소중한 나의 식구니까.
그래서 수고했어요, 내 이웃의 식구들도. 그리고 고마워요. 이런 귀한 마음 새겨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