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운사이클링, 순환의 역설

양말목은 양말목이 아니다.

by 종이소리
양말코밥(봉조밥) 업사이클링 ⓒ김수경 2020



Recycling? I call it down-cycling,” he said.


“They smash bricks, they smash everything. What we need is up-cycling, where old products are given more value, not less. What you are talking about is waste management, not recycling.”

라이너 필츠(Reiner Pilz), 1994


업사이클링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소개글이다.


"리사이클링이 아니라

파괴야, 다 부수는 거지!"

라고 역설한 그의 외침은

내게는 무척 중요한 철학이다.


"벽돌을 부수고, 모든 걸 망가뜨리잖아.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건 ‘업사이클링’이야.

낡은 것들은 쓸모없는 가치가 아니라,

더 높은 가치를 가지게 되는 일이지.”


리사이클링은

‘다시 순환하는 일’이라 믿어왔다.


그런데 라이너 필츠는 그 단어에

“Down”이라는 말을 붙였다.
왜일까. 그는 왜 그렇게 말했을까?


"Down"의 의미가

단지 "아래"를 뜻하는 것은 아닐 테고,

몰락일까 추락일까.


강등. 하락. 파괴. 등의

잔혹한 의미처럼 느껴져

무시무시한 기분이 들었다.


‘리사이클링’의 과정이

가치의 하락’이란

의미를 담아서일까?


폐건축물에서 폐기물을 수집하는 그가

다운사이클링을 말한 것은

살릴 수 있는 것들을 무분별하게

파괴하고 버리는 것에 대한

항변이자 역설일 것이다.


우리는 ‘순환’을 말하면서도,
실은 ‘분해’와 ‘파괴’를 반복해 왔다.


1990년대의 유럽,
산업 재생의 효율을 외치던 그 시절,
필츠는 그 불편한 진실을 가장 먼저 목격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리사이클링, 업사이클링이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개념의 방향으로 지적했다.


“벽돌을 부수고,

모든 걸 망가뜨리잖아.”


그의 말은 단순한 분노가 아니라,

‘복원’이라는 이름 아래 자행되던

파괴에 대한 철학적 질문이었다.


‘우리는 무엇을 되살리려 하는가?’


그가 던진 이 질문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업사이클링’이라는 단어의

출발점이 된 것이다.


그의 기사에 심취해 있던 나는,

"다운사이클링" 이란 부분에서

무릎을 탁 쳤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오른손이 가슴으로 향했다.
심장이 쿵쾅쿵쾅 울렸다.


“그래, 바로 그거야. 다운사이클링.”


내가 그렇게도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출구.


업사이클링이라는

찬란한 포장 속에 숨겨진,

부끄러운 양심 한 조각이

마치 얼음 깨지듯,

조용히 빛을 토했다.


'과연 이 작업이,

이 실천이 제대로의 길일까?'
'정말로 지구를 위한 일일까?'


그 의심이 나를 오래 괴롭혔다.
수없이 번민하고,

때로는 작업의지를 꺾기도 했다.


‘순환’이라 믿었던 것이
사실은 또 다른 ‘소비’의

부끄러운 이름이 아닐까 하는

모순 앞에서.


그 이야기를, 나는

양말목에서부터 시작해야겠다.


다소 불편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지금은 더 나은 방향으로의

각성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그리고 그 불편함이야말로,

더 나은 순환을 향한 각성의 징후니까.


지금이 바로, 그 방향을

다시 물어야 할 때라고 믿으니까.


양말봉조밥 업사이클링 (좌)가방2020 (우) 가리개2025 더기나무와 콜라보

양말목은 양말목이 아니다


한국에서 업사이클링 공예,

친환경공예로 알려진 “양말목공예”.


쓰리고 아픈 이야기지만,

이름부터가 제자리를 벗어나 있다는

사실을 고백해야 겠다.


양말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물으면,
그 부위의 명칭은 “봉조밥”이라고 하며

영어로는 “토부(Toe Part)”이다.


나는 양말코밥이라고 부른다.

'밥'은 부스러기의 순우리말이다.


봉조부스러기란 뜻이다.

봉조는 봉제의 개념과 달리

직조, 편직 하다의 의미이고,

직조와 편직 된 직물을 이용해서

옷이나 패션, 인테리어 소품을

만드는 작업은 봉제라고 한다.


편직 봉조 과정에서 나온

부스러기를 뜻하는 이 봉조밥이

양말목으로 변한 까닭은

너무 잘 아는 이야기지만

"사실 잘 모르겠다"가 명답이다.


박완서 작가의 소설 《미망》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양말목은

몸체와는 달리

안뜨기 겉 뜨기를

번갈아 짜야하는

고무 뜨기여서

시간이 많이 걸리고

보다 숙련된

기술을 요했다.”

— 박완서, 《미망》


이렇듯 ‘양말목’이라는 단어의

정확한 위치를 설명하자면,
발목에 닿는 부분으로,

탄력성과 복원력이 핵심인

편직 구조이다.


오송코리아 대표님께서 챙겨주신 봉조밥 설명자료. 세심하게 챙겨주시는 마음, 늘 고맙습니다.



하지만 지금 국내에서

‘업사이클링 소재’로 불리는 양말목은

그 고무 뜨기 조직이 아니며,

위치조차 완전히 다르다.


즉, 우리가 업사이클링으로 쓰는

‘양말목’은 ‘양말의 목’이 아닌 것이다.


고착된 이름, 고쳐야 할 이름


국어대사전의 정의와

현장의 용어가 어긋난다.
그래서 나는 이 부분을

바로잡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양말목공예’라는 이름은
교육 현장과 SNS를 통해

너무 깊게 뿌리내렸다.


“그게 뭐 그리 중요한 일이냐”

라고 따지는 사람도 있었고,


“잘못된 걸 아이들에게

가르치기 싫다”는
학부모의 따끔한 눈빛도 있었다.


나는 업사이클링 전문가도 아니고,
국어학자도, 양말봉제 기술자도 아니다.
그저 이 모순을 바로잡고 싶었던

공예가일 뿐이었다.



모순의 한가운데서


한참 혼란의 연속극을 찍던 어느 날이었다.

이름을 밝힐 수 없는 그분께서 내게 말했다.


“무슨 업사이클링 작가가 그 모양이오?

그러고도 환경미술 하는 작가란 말이 나와요? 쯔쯔쯔, 한심해서 원…”


그 한마디에 나는
형편없는 무지렁이,

파렴치한 작가가 되어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내가 무얼 하고 있는지

깊이 고민하게 되었고 슬럼프에

허덕이게 되었다.


양말코밥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조용히 물어보았다.


"이 조각들이 정말

‘지구를 위한 예술’ 일까?

과연 업사이클링일까?"


라이너 필츠는 뭐라고 할까.

이 의문의 작업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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