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30
최근 환경 뉴스에서는 나일론 그물을 대신할 PBAT 생분해그물을 개발했다는 반가운 소식을 보도했다.
PBAT: 생분해성 플라스틱의 명칭 PBAT(Polybutylene Adipate Terephthalate)
개발이 된 만큼 신속하게 보급이 확대된다면, 한국의 어촌은 수산자원 및 해양생태계 보호 효과와 함께 친환경 어촌 마을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다행이다. 참 다행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 그들의 한숨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해 답답한 심정이었는데, 이제야 숨통이 트이는 듯하다.
천혜의 자원이자 환경의 보고(寶庫)인 경상남도 통영 산양읍 연명마을에서 지내던 2019년 여름. 산책길에서 만난 해양 폐기물 집하장에서 무수하게 엉킨 채 버려진 폐그물과 쓸모를 다한 스티로폼 부표(浮標)들이 내 발걸음을 붙잡고 하소연을 했다.
그물은 나일론이요, 부표는 스티로폼이라. 어쩌나.. 나도 그 이름은 무지한 방면인데..
인간의 편의를 위해 사용하는 도구 대부분이 화학제품인 현대사회에서, 환경을 위해 만들지 말라고 할 수도, 더 이상 쓰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아이러니한 입장의 소비자이기에, 폐그물과 폐부표의 한숨에 그저 시커먼 내 한숨을 보태는 것이 유일한 대꾸였다.
"그래도.. 뭐라도 해봐야 하지 않을까? "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 차를 끌고 다시 가서 폐그물 한 묶음과 널브러진 스티로폼 중 가장 깨끗한 것 하나를 차에 실었다.
실어 온 그물을 마당에 펼쳐놓고 샴푸 물에 담갔다가, 저녁 무렵 헹궈 내기를 수차례 반복했다. 스티로폼은 상처 난 곳과 오염된 부분을 도려내고 모양을 다듬었다.
그러나 마음은 다소 불편했다. 내가 경계하던 작업을 어불성설처럼 자행하고 있어서다.
업사이클링을 위해 또 다른 자원인 깨끗한 물과 전력을 과하게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는 나의 오랜 신념이 일순간 무너져 내렸다고 할까.
"이런 순간이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절박한 하소연이 필요한 때가."
사실 나는 이 지점에서 야속한 오해를 받기도 했다.
"이왕 멋진 디자인을 뽑았으면 기법을 공개하고 공유하는 게 좋지 않나요? 왜 혼자만 알고 계세요? 그거 욕심 아닌가요?"
이런 날 선 질문들. 나는 그저 허허허 웃으며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하곤 했다.
그 침묵은 인색함이 아니라, 깊은 고민의 산물이었다. '업사이클링 공예'라는 프로그램이 하나 생기는 순간, 폐자원이 새로운 소재로 개발되어 공예용 재료로 별도 출시되거나 이를 다루기 위한 새로운 플라스틱 도구가 개발되는 주객전도의 상황을 여러 번 목격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역설적인 상황이 두려웠다.
아이디어는 차고 넘치지만 선뜻 세상에 내놓지 못하는 이유, 혼자만 꽁꽁 숨겨놓는 욕심쟁이'를 자처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이 두 가지가 업사이클링의 최우선 가치로 삼아야 한다는 것,
그것이 내가 욕심쟁이로 남아서라도 지키고 싶은 창작의 윤리임을 이제야 고백한다.
라이너 필쯔(Reiner Pilz)는 업사이클링이라는 개념을 처음 제시하며, 버려지는 것들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일이 왜 중요한지를 역설했다.
그가 말한 '친환경 소재 제품이 더 높은 가격에도 가치를 인정받는 이유'는 단순히 디자인의 우수성 때문이 아니다. 환경을 사랑하는 이들의 철학과 자연과 '공존'하려는 삶의 신념이 진정한 소비자의 윤리이자 실천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 결 위에서, '덜 쓰고 덜 해치며' 다시 숨을 불어넣는 진정한 의미의 업사이클링을 실천하고 싶다.
이러저러한 고민과 혼자만의 변명으로 손질하던 그물을 펼쳐보니 군데군데 삭아서 끊어지거나 찢긴 구멍이 투성이었다.
버릴 부분은 과감하게 잘라내고 그물 자체를 통으로 비틀어 로프를 만들었다. 펼치면 숭숭 구멍이 나는 그물이지만, 한데 뭉치면 제법 튼튼한 끈이 된다는 점을 활용해 직조 기법으로 엮어 본 것이다.
그물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결이 무늬가 되도록 머리도 꽤 썼다.
결과물은 제법 근사하다. 단단한 스티로폼 부표는 테이블 겸 의자의 내장재로 아주 훌륭한 소재가 되었다.
사실 골칫덩어리 쓰레기 중 하나인 이 스티로폼은 98%가 공기로 구성된 소재이기에, 잘만 활용하면 버리기 아까운 가치 있는 물건으로 둔갑한다.
해외에서는 스티로폼을 활용한 설치미술 작가들의 기발한 작품이 얼마나 많은가.
물론 전시 후에는 다시 사라져야 할 운명이지만, 작품을 통해 '다시 쓰임'과 '더 나은 쓸모'를 강조하며 스티로폼이라는 소재를 다시 보게 만든 것은 분명한 본보기였다.
찬란한 별처럼 빛나는 이름 높은 작품을 빚지는 못해도, 나는 그저 자연의 '곁'을 지키고 싶다.
하얀 파도의 끝자락이
보드라운 모래밭 어디쯤에
레이스 무늬를 남기고 숨는
바닷가 그 길 어디쯤에다
수초로 이은 파라솔 몇 개 꽂고
한 없이 늘어지는 몸을 품어주는
나른한 안락의자 곁에
그물로 엮은 '초대'와 함께
따사로운 오후를 누리는 상상을 한다.
비록 현실은 차가운 겨울이고
비참한 창궐*의 시대지만
그래서 더 간절한 잔치인가.
동해가 좋을까.
남해가 좋을까.
서해면 또 어때.
초대가 어울리는
그 물빛 하늘 아래라면.
초대와 함께 누릴 수 있는
파아란 바닷소리 곁이라면.
(창궐* : 코비드19) 시절이었던 2020년에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