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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꽃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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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ojeong Kang Jan 09. 2022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Welcome to my place

https://www.donga.com/news/Entertainment/article/all/20150414/70684628/4


나의 토요일이 늘 그렇듯, 느지막이 일어나 세수하고는 머리를 대충 올려 묶는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오늘은 굳이 요리책이라는 것을 어디다 펼쳐둘지, 나의 기역 (ㄱ) 자 주방 카운터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다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주욱 훑는다는 것이다. 누군가 이 순간을 보았다면 아마도 내 자신을 위한 주말 브런치를 준비하는 거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제목이 이렇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손님상'.


몇 주 전 중고서점에 들렀었다. 또 두 손목이 끊어질 듯 무겁게 들고 와서는 책장에 꽂기만 할 텐데도 난 이미 중고서점 안을 걸어 다니고 있고 또 이 책, 저 책, 한 권씩 집어 들다, 내려놓다 그러다가 문득, 요리책... 요리책을 사야겠다! 이 책만 가뿐이 데리고 온다.


우리의 그 치열했던 고등학교 시절을 함께한 친구, 그 꽃 같던 아이가 결혼하고 처음으로 남편과 함께 우리 집에 들르겠다고 한다. 그 꽃 같던 아이가 그런다. 눈으로 홀리든지 맛으로 홀리든지 둘 중 하나는 해야 한다고. 남편한테 내 음식 솜씨를 자랑했단다.


(문제는 그 음식 솜씨라는 게...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 꽃 같던 아이의 남편은 이탈리아 사람이다. 한국 사람의 눈 맛, 입 맛에 이탈리아 사람의 눈 맛, 입 맛도 사로잡아야 한다는 뜻밖의 미션을 부여받고 말았다. 이 네 가지를 다 사로잡는다는 계획은 애초에 무리일 테고, 그냥 눈 맛만 사로잡자, 입 맛은 나도 모르겠다. 계량도구 대신 밥숟가락과 종이컵이면 된다고 '한국인이 좋아하는 손님상'을 수백 번 차리신 분들이 말씀하셨으니 그렇다 생각하고 따라 하면 될 것이다. 안되어도 난 잡아땔테다, 요리책 선생님이 그렇게 시켰다고. 난 우길 테다, 두 사람을 향한 나의 애정이 듬뿍 담긴 요리가 맛이 없을 수 있냐고. 내 첫 번째 요리 철학도 함께 맛보게 해 줄 테다.


'쉐프의 요리는 혀로 맛보는 것이지만, 나의 요리는 심장으로 맛보는 것이다'


다음 주말 즈음, 꽃 같은 부부가 방문할 것이다. 재료는 이미 냉장고에 준비되어 있다. 요리책을 요리조리 이것저것 살펴보다가, 생각나는 재료들을 퇴근길에 이 것, 저 것, 사고야 만 것이다. 어떤 것은 투명 비닐봉지 속에, 어떤 것들은 20L 종량제 봉투 속에, 또 어떤 것들은 나와 10년 넘게 함께한 초록색 Whole Food 장바구니 속에 들어있다. 벌떡 일어난다. 연습이나 해볼까, 막상 냉장고 문을 열고 나니, 재료 꺼내는 게 귀찮다. 그러고는 지금까지 그 재료들을 잘 보관하고 있었고, 앞으로도 잘 보관할 냉장고의 능력을 잠시 칭찬한 뒤, 문을 닫는다.


일주일이 지났다. 그날이다. 내 주방 카운터 위에 1인치 간격으로 벗하고 있는 전기밥솥, 전자레인지, 커피머신과 토스터 사이를 견주어 보다가, 결국은 높이가 비슷한 전자레인지와 커피머신 사이로 요리책 등을 교묘히 끼우고는, 책 페이지가 계속 열려 있도록, 500ml 생수병을 올려놓는다. 냉장고를 열고 투명 비닐봉지, 종량제 봉투, 장바구니들을 꺼낸다.


(예상을 안 한 것은 아닌데...)


붉고 노랗고 푸른 야채들과 버섯은 비닐봉지 안에 군데군데 뭉개져 있다. 또 이 검은 비닐봉지는 뭔가. 냉동실에 들어있어야 할 소고기가 아닌가. 일주일간 냉장실에서 의도치 않게 숙성되었다. 내 두 번째 요리 철학이다.


'요리는 내 창조성을 싹틔우고 자라게 한다’


자 이제 시작해볼까. 숙성된 소고기는 양념에 재워야지. 마늘, 생강 좀 더 넣으면 되지 뭐. 로즈마리, 타임? 아직 그게 여기 있나? 어디보자, 이 서랍 저 서랍, 각종 파우치들과 양념통들 중에 로즈마리랑 타임은 없다. 아, 카레가루? 생선 비린내를 이걸로 잡는다는데, 소고기 꼬린내도 잡을수 있겠지, 이상하면 버리면 된다. 내 음식물 쓰레기봉투는 늘 반쯤 비워진 채로 냉동실 가장 아랫칸 서랍에서 대기 중이다. 그런데 말이지, 아... 내가 먹을 게 아니라 우리가 먹을 거구나.


이 새삼스러운 생각에 머리가 띵할 즈음, 나의 꽃 같은 친구 부부가 30분 뒤면 도착한단다. 그러고 보니 정작 소고기를 구울 프라이팬이 없다. 딱 하나 있던 프라이팬은 생선을 굽는 미션을 과도하게 수행한 이후로, 그 냄새까지 완전히 흡수해 버리고 전사했다. 세 번째 요리 철학이 등장할 타이밍이다. 이탈리아 사람에게 한국 사람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도 덤으로 알려줄 수 있게 되었다.


'요리는 꼭 내가 완성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배달의 민족이니까'


새로이 먹기 시작한 하겐다즈 아이리시 위스키 파인트가 냉장칸에 들어있는 것을 알았을 때만큼이나 아찔해진 정신을 붙잡고 배달 앱을 켠다. 한식? 양식? 아니 그럴 필요도 없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손님상'에서 이미 메뉴는 알려주었다. 그냥 그 메뉴대로 고르면 된다. 이제 마지막이다.


'요리의 매력은 그 끝을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내 나름의 기준에 따라 유통기한을 넘긴 것이라고 판결을 내린, 음식으로 승화되지 못한 냉장고의 재료들은 이제 음식물 쓰레기봉투로 들어간다. 꾹꾹 눌러 담아 넘쳐흐를듯한 쓰레기봉투 입구를 아슬아슬 묶고는 버리러 간다. 3개가 될 뻔 한 걸 2개의 봉투로 만드는 나의 야무진 손은 기특하다. 정말 마지막이다.


'요리는 보이지 않고, 맛보지 않는 곳에서 끝난다'


요리한적 없는 것처럼 깨끗하게 치운다. 요리책을 책장에 도로 꽂는다. 꽃 같은 부부가 도착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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