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력을 교정하다
(Akseli Gallen-Kallela, Afternoon Repose)
삼십 년 넘게 좌우 시력 1.0이다. 길에서 누군가 날툭 친다. 이젠 아는 척도 안 하나 봐? 그는 해명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그냥 성큼성큼 가버린다. 난 너 못 봤어, 못 봤단 말이야. 그는 본인의 기분만을 배려하느라 내 생각에는 관심도 없다. 뭐 그러던지!
한참 일하는 중이다. 세미나가 있으니 당장 회의실로 오란다. 하던 일을 멈추고 오라는 것을 보면 연사가 꽤 유명한 사람인가 보다. 이름을 외우는 재능은 개발해본 적이 없다. 좋아하는 사람의 이름은 기억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이미 기억하고 있지 않은가, 사고 싶은 제품은 이름뿐만 아니라 이미 사양까지도 꼼꼼하게 체크하고 있지 않은가. 아마 그는 내 기호와 상관없는 사람일 거다, 어쩌면 내용도 내 관심사가 아닐 거다. 역시 예상은 틀리지 않는다. 그 세미나는 가만히 앉아서 듣기엔 마치 시험 치기 위해 억지로 듣는 수업 같다. 시간과 비례해서 급격히 피곤해진다. 우리 보스는 저 사람을 왜 불렀을까. 난 왜 동원된 걸까. 기분은 좀 낫다. 별 관심 없는 세미나를 월급을 받으면서 듣고 있다. 나는 월급쟁이다. 잘 들을 수 있지? 날 달랜다. 원래 일은 열심히 하면 피곤한 거야. 어차피 졸 수는 없다. 보스의 새로운 화풀이 대상이 될 필요는 없다.
눈을 부릅뜬다. 발표 화면을 본다. 뭔가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을지도 몰라. 이게 뭐지? 글씨 하나하나가 눈에 반짝거린다. 내가 마음을 너무 예쁘게 달랬나 보다. 잠시 딴생각에 빠진다. 난 원래 이 세미나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기억한다. 다시 화면을 본다. 또 글자들이 반짝거린다. 뿌옇게 연결되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너무 열심히 일하고 있나 보다. 피곤해졌나 보다. 그런데 5분밖에 안 지났다. 뭐지? 잠깐만! 나도 안경 써야 하는 거야? 그럴 리가 없다. 난 삼십 년 넘게 좌우 시력 1.0이다.
기억을 되짚는다. 안 보였던 적이 있나? 한참 생각한다. 쓸데없이 길다고 생각했던 세미나 시간은 생각하기 참 적당하다. 안 보여서 불편했던 적이 있냔 말이다. 사실은 안 보여서 편했던 적이 있다. 길 위에 덩그러니 있는 것이 쓰레기인지 고양이 시체인지 알아보지 않아도 되지 않은가. 길에서 지나가는 모든 사람을 알아봐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가끔은 아는 척하기 싫은 인간들이 있지 않은가. 미안, 눈이 많이 나빠졌나 봐. 안경 맞출 시간이 없네, 마음에 드는 안경테를 아직 못 찾았어. 온갖 종류의 핑계도 순식간에 떠오른다.
안경을 쓰면 좋을지도 모른다. 다 볼 수 있다. 다 봐야 하나? 갑자기 궁금해진다. 안경을 쓴다는 것은 보고 싶은 것만 볼 수 있는 특권을 포기하는 것이다. 보고 싶지 않은 것은 안 보면 그만이다. 이미 내 눈으로 너무 많은 정보가 들어오고 있다고 느낀다. 실로 피로하다. 같이 봤으면서 넌 왜 그거 기억 못해? 미안하다. 넌 재미있었나 보다. 너한테 중요한 것이었다면 네가 기억하면 좋겠다. 또 혼쭐이 난다.
눈이 나빠진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시각정보들에 대한 새로운 여과장치가 생겼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겠지. 세미나가 마쳤다. 질문이 있는지 물어본다. 과연 원하는 것만 볼 수 있는가. 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도 눈이 나빠져서 못 보고 지나칠 수도 있지 않은가. 나는 대체 무엇을 보고 싶은 것일까. 무엇 때문에 보고 싶지 않은 것을 열렬히 차단하고 싶은 것일까.
꾸부정한 할머니가 거듭 인사하시며 식당으로 들어오신다. 왼손으로는 작은 상자가 들려있고 오른손으로는 이젠 더 이상 공장에서 생산되지 않는 여러 가지 껌들이 들려있다. 나에게 오른손을 들이미신다. 난 퇴근 중이라고요. 피곤하다고요. 오늘도 손바닥을 위로 내미시고는 테이블을 떠나지 않으신다. 지갑을 뒤진다. 껌은 그냥 가져가세요.
추운 겨울에 손목과 발목이 다 드러나도록 옷을 걷어 올린 외국인 남자가 지하철 안으로 들어온다. 춥지도 않나 봐. 그 드러난 손목과 발목에는 감염이 너무 심해 진물이 흐르고 있다. 손세정제가 어디 있지? 가방을 뒤진다.
저 멀리 자리가 났다. 이젠 손잡이를 잡지 않아도 된다. 난 아프면 안 된다. 다행이다. 정말? 그는 아파도 되나? 아참. 그 할머니, 왜 또 나타난 거야. 내가 걱정이라도 해야 되는 거야? 마음 아픈 건 더 싫다. 새삼 내 눈에 아른거린다. 눈을 감는다. 소용이 없다. 내 마음은 내 몸보다 더 흐느적거린다. 이내 녹아버려서 달리는 지하철과 지하철 레일 사이에서 짓니겨 지는 것 같다.
눈이 나빠져도 보이는 것은 보인다. 봐야 하는 것은 보이고 만다. 시력은 교정 중이다.
안경을 맞추었다. 안경 맞출 시간을 내었고, 마음에 드는 안경테를 찾았다. 보고 싶어진 것을 더 잘 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