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촌년의 명절맞이 이야기 2

by subitopiano







아빠의 잦은 전근 덕택에 나는 작은 시골 마을이었던 고성읍부터 섬마을 거제도까지 경상남도 방방곡곡에서 유년기를 보냈는데, 교육열이 있었던 엄마의 완강한 압력으로 그나마 대도시인 부산에 정착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지냈다. 최근에 마산에 들러볼 일이 있었는데 오늘내일이 다른 서울과 달리 예전과 거의 달라진 것이 전혀 없어 놀랐다. 하긴, 경상도 사람들은 대체로 변화를 싫어하고 보수적이면서 강압적인 부분이 분명히 있다. 아직까지도 남아선호 사상이나 나이 먹은 벼슬의 무소불위 권한이 가장 심하게 자리 잡은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나는 그 남아선호 사상을 느껴 본 적이 없다. 적어도 집에서 남동생에 비해 부당한 차별대우를 당했다던지 하는 서러움은 없었는데 이것이 경상도에서 20년을 나고 자란 사람에게 얼마나 드문 일인지는 나중에 알게 되었다.


아들을 많이 낳은 자부심으로 나의 할머니는 당신의 인생 업적을 완성하신듯 했다. 그 시대에는 다들 그랬다고는 하지만 할머니의 자존감이 부당한 시집살이의 화살로 엄마를 공격했을 때 엄마는 많이 울었다. 팔이 안으로 굽다 못해 명백히 아빠가 잘못했을 때 조차도 할머니는 엄마를 나무라셨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엄마에게 아들을 낳으라고 압력을 행사했다거나 첫째로 딸을 낳았다고 (=나) 구박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큰며느리의 책임 의식을 크게 느끼는 사람이어서 첫째를 딸을 낳아 몹시 서러웠고 내 동생을 낳기 전까지 아들 낳은 사람들이 너무너무 부러웠다고 했다. 둘째도 딸을 낳을까 봐 전전긍긍한 엄마는 성별 감별을 받기로 결심했다. 세상 법 없이도 살 사람인 당신이 작정하고 저지른 (아마도 거의 유일한) 불법인 일이었을 텐데, 출산 전 의사에게 5만 원을 주고 아들임을 확인받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기뻤다고 했다. 엄마가 또 딸을 낳을까 봐 걱정했던 외할머니는 아들이라는 소리를 듣고 “아이고~ 영숙아 이제 됐다. 이제 됐어- ”라고 하셨다. 외할머니는 철마다 동생 먹이라고 흑염소 개소주 보약을 해 보내셨다. 아들 낳은 딸을 위한 노모의 마음이었다. 나는 그걸 내가 먹지 않아도 되어서 너무나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나는 지금도 속으로 엄마가 동생보다 나를 조금 더 좋아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나라는 사람을 통해 엄마가 ‘엄마’가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부곡하와이의 동생과 나. 놀러 갈 때 저런 아방가르드한 원피스를 만들어 입혔다니, 엄마...


명절이 되어 본가인 부산에 내려가면 아직도 아들 가진 할머니들의 자랑이 유난스러울 때가 있다. 아니 시대가 어느 때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 어깨가 너무 으쓱하고 당당해서 왠지 입을 다물게 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딸 출산 후 친정에서 보내주신 시루떡을 땅에 다 파묻었다는 어느 시어머니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할머니가 되어서도 잊혀지지 않는 그 어린 새댁의 서러움은 경상도 여기저기에 남아있는 듯하다. 아직도 이곳에서는 멀쩡한 시루떡을 땅에 파묻고들 계시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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