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이 지키는 침묵의 윤리
영국의 비싼 월세를 못 버티고
가게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이 금싸라기 땅에서,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버티나 싶은 공간이 있다.
바로 에든버러의 앤티크 고서점이다.
1초면 검색이 끝나는 구글 시대에
굳이 낡은 종이 냄새를 맡으며 시간을 직접 만져보고
싶어 하는 '고집 센' 사람들.
그들이 만든 기적 같은 공간의 문을 열면
비현실적인 공기가 코끝을 스친다.
유난히 눈에 띄지만,
무심코 올려져 있는 검붉은 양장본을 발견했다.
차갑고도 부드러운 가죽의 질감,
낡은 금박의 요철. 가득 채운 섬세한 채색과
꽃과 새가 얽힌 문양.
1870년대의 공기를 머금은 책장에서는
마른나무와 오래된 종이가
섞인 특유의 향이 풍겨온다.
스마트폰의 매끄러운 화면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누군가의 손때와 세월이 겹겹이 쌓인 물성이
손바닥을 통해 심장으로 전달되는 듯하다.
이곳의 구조는 불친절하다.
책들은 분류법을 비웃듯 천장 끝까지 솟아 있고,
그 사이를 지탱하는 것은
위태로워 보이는 나무 사다리다.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나갈 법한 좁은 통로와
가파른 계단은 방문객의 편의를
고려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불편함'은 의도된 정밀 설계처럼 느껴진다.
빨리 찾고 빨리 나가는 현대의 효율 대신,
이곳은 느리게 헤매게 하는 시간을 선택했다.
미로 속에서 길을 잃는 것은 이 공간이
관객에게 요구하는 유일한 예의처럼 보인다.
한 세기를 건너온 사물들은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지만,
끝내 사라지지도 않는다.
황동 장식과 버클이 달린 성경,
빅토리아 시대때, 스페인 중세 구전 서사시를
영국 낭만주의 감성으로 재해석한
Spanish Ballads의 장식 타이틀.
그리고, 19세기 종교 역사서를
담은 Fleetwood의 두툼한 책.
조심스레 가격을 물어보니,
가장 가격이 나가는 것은
약 800 파운드, 한화로 150만 원 남짓.
이런 것들은 원래 유리 진열장 안에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여기서는 그냥 일상처럼 툭 놓여 있었다.
그 태연함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
우리는 흔히 문화가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에든버러의 고서점에서
목격한 것은 보존을 향한 어떤 뚝심이다.
접근성보다는 연속성을,
편의보다는 본질을 지키려는 태도.
서점 주인은 손님에게 말을 거는 대신,
안경 너머로 낡은 페이지를 세밀하게 살핀다.
그는 책을 파는 장사꾼이기 이전에,
잊히기 쉬운 인류의 기억을
붙잡아 두는 파수꾼에 가깝다.
황금빛 장식이 수놓아진 성경과 역사서들이
빽빽한 선반들 사이에서,
우리는 우리가 지켜야 할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다시 묻게 된다.
이곳에서 중심은 사람이 아니라 시간이었다.
내가 이 공간에 머물다 가는
짧은 시간조차 책들에게는
아주 짧은 스침에 불과할 것이다.
사람이 배경으로 물러날 때,
비로소 문화의 깊이가 보이기 시작한다.
어찌 보면 케케묵은 이 공간에.
우리는 잠시 빌려 쓸 뿐이다.
이 공간은 그보다 오래 남는다.
문을 나서자 에든버러의 특유 회색 하늘이 펼쳐졌다.
다음 글에서는, 이 공간에 허락된 또 다른 존재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