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티크 서점 Ⅱ: 130여 년 전 하인의 축사

낮은 곳에서 건네는 우아한 축사

by SooJin Jung


확실히 눈으로 목격했다.

시간 속에 흩어졌던 개인의 역사가

누군가에게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기억의 보관소'인 앤티크 서점이다.

구석진 서가에서 발견한 해진 책 한 권,

[The Poetical Works of John Payne]

내 손에 닿는 순간 묵직한 떨림을 전했다.

첫장을 보는 순간 그 책을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주인아저씨와 함께 푼

134년 전 암호


“아니, 이 책, 범상치 않은데요?”

주인아저씨에게 이 낯선 필기체의

정체를 알려 달라고 했다.

아저씨 눈도 반짝이는 눈으로

빛바랜 잉크가 남긴 문장들을 하나하나

'해독'하기 시작했다.

마치 묻혀 있던 보물지도를

함께 발견한 아이들처럼 말이다.



1892년 5월 25일,

세 명의 여성의 축하


함께 읽어 내려간

문장은 기대보다 훨씬 뭉클했다.


We, your dear Mother's Servants, beg your acceptance of this Bible in remembrance of your wedding day. With our best wishes for your future happiness. 당신의 어머니를 모시는 저희 서번트들이, 당신의 결혼날을 기념하며 이 성경을 받아 주시길 간청합니다. 당신의 앞날에 행복이 가득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하며, 저희의 가장 진심 어린 축복의 징표로 이 선물을 드립니다.


애디슨 크레센트 4번지에서,

Sarah, Martha, Charlotte 올림

1892년 5월 25일


"세상에, 서번트들이 보낸 결혼 선물이었군요!“

주인아저씨가 감탄을 내뱉었다.


19세기 한 가문의 살림을 돕던

세 여성 사라, 마사, 샬럿은

자신들이 돌보던 집안의 자녀가 독립하는 날,

정성을 다해 이 책을 골랐을 것이다.


단순히 고용 관계에 얽힌 노동자'ㅣ가 아니라,

가족의 역사를 곁에서 지켜보고 응원해 온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말이다.


성경을 선물한다고 적어놓고, 정작 이 시집에 헌사를

남겼다니... 혹시 성경책 사이에 끼워두었던 편지가 이 책으로 옮겨온 걸까?

아니면 시집을 성경만큼 귀하게 여겼던 걸까?

주인아저씨의 추측에 내 상상력도 덧붙여졌다.

수수께끼를 그대로 남긴 채 돌아왔다.



낯선 필체가 가르쳐준 존중의 방식

내가 오래 들여다보는 것은 결국 사람을 대하는 태도다. 이런 사소한 기록에서 오히려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당시 교육의 기회가 적었던 계층인 서번트, 하인이었을 텐데, 그들이 유려한 필기체로 격식 있는 문장을 구성하고 선물을 건네는 방식은 그 어떤 귀족의 축사보다 우아하고 품격이 넘친다.


주인아저씨는 책을 내게 건네며 허허 웃었다.

"이 책의 진짜 가치는 가격이 아닌 이 안에 적힌 이름들에 있네요."


아마 런던의 'Addison Crescent'라는 구체적인 주소가 적힌 이 책이 에든버러의 작은 책방까지 흘러와 내 손에 닿기까지, 이 책은 그 자체로 100년이 넘는 여행을 해온 셈이다.



오래된 종이가 건네는 '돌봄'의 메시지

저런 섬유질이 그대로 드러난 종이 질감은 처음이었다.


현재 나는 예술과 공간, 그리고 돌봄의 현장에서 사람을 대하는 방식을 기록하고 있다. 이 책 속의 이름들은 마치 나에게 이렇게 묻는 듯하다. 우리는 우리 곁의 사람들을 어떤 이름으로 부르고, 어떤 마음으로 존중하고 있는가?" 낡아서 부풀어 오른 책장은 그만큼 많은 이의 손길과 진심이 쌓였음을 증명한다.


책의 주인은 바뀌었지만, 1892년 세 명의 여의 짤은 글이 2026년 에든버러를 사는 나에게 선명한 인사이트를 준다. 문화예술이란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좁히고 서로를 '관객'이자 '주인공'으로 귀하게 대접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중고책을 고르는

나만의 사소한 규칙


이 경험 이후로 나는 확신이 더 강해졌다.

중고책은 표지보단 첫 장부터 봐야 한다.


- 첫 장에 이름과 날짜가 있는지

- 서점 스탬프, 도서관 라벨이 남아 있는지

- 편지처럼 끼워진 종이가 있는지

- 연필 메모 흔적, 그 사람이 어떤 페이지에서 멈췄는지

- 접힌 모서리, 누군가 잊고 싶지 않아 꾹 눌러 접은 마음


이건 수집가만의 취미가 아닌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가장 다정한 '사건 현장'에 참여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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