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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진 Jan 16. 2021

어차피 화를 낼 거라면

툭하면 화를 내는 사람의 변


아주 오래전, 좋아하는 야구팀이 아주 어처구니없이 패배한 날이었다. 그간 성적이 쭉 안 좋았다. 순위는 저 아래 처박혔고 반등의 가능성은 보이지 않았다. 자세히 기억은 안 나지만 부상 선수도 꽤 있었던 것 같다. 매일 저녁 속이 까맣게 타들어가던 시절이었다. 같은 팀을 좋아하는 친구와 매일같이 나누는 카톡에 즐거운 이야기라곤 없었다. 감독 탓을 하다가 프런트를 욕하다가 이런 팀을 고른 우리의 팔자를 원망하곤 했다. 그 날엔 뭘 더 토로할 에너지도 없이 넋두리만 이어지고 있었다.


 [ 슬퍼 ]                                                                   
                                                          [ 힘들다 진짜 ]
 [ 너무 답답하고 짜증 나 ]
                                                          [ 내 말이 ]


그러다 친구가 보낸 메시지를 읽고 머리가 멍해졌다.

 

 [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


당시 내가 힘들고 답답하고 짜증 났던 이유는 누구에게도 직접 화를 낼 수가 없어서였다. 이 총체적 난국에 아무도 탓할 수가 없다. 야구는 팀 스포츠고, 스포츠란 최선을 다 해도 승자와 패자가 있게 마련임을 안다. 아니 근데 감독이 투수만 제 때 바꿨어도? 그때 병살만 안 쳤어도? 휴... 아냐, 야구에 만약이란 없어. 만약이고 나발이고 그냥 이 팀이 못 하는 거야. 화가 났다. 야구팬의 화는 향할 곳 없는 미사일이다. 괜히 맘 속을 빙빙 돌다가 저 혼자 터진다. 이래서 프로 야구가 건강에 나쁘다는 말이 나오는 거다.


그런데 내 친구는 이 팀에 뭘 해줄 수 없어서 슬프단다. 되게 건강한 접근이다! 얼핏 무기력해 보이지만, 선하고 긍정적이며 교양이 넘쳐. 나는 왜 그런 생각을 못 했지? 팬이라는 건 누군가를 좋아하고 응원하는 존재인데. 좋아하는 팀이 자꾸 지니까 속이 상했을 뿐인데. 나는 왜 그 감정이 '화'로 번졌을까. 왜 그렇게 누굴 탓하고 싶었을까. 사실 이 분노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데(선수를 ‘까야’ 잘한다는 야구팬들의 속설도 있긴 하다만... 사실이라면 나의 팀은 일찌감치 순위가 올랐어야 했다), 도통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화를 뭣하러 키웠느냔 말이다.


이 날을 계기로 '화내는 나'에 대한 성찰이 시작됐다.


내가 남들보다 화가 많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어떤 사안에 남들은 4~5 정도 화를 낼 때마다 나는 10씩(아니다.. 30인가) 화가 났으니까. 친구의 화가 “와 진짜 빡쳐”에서 그칠 때 나는 자꾸만 “아니, 이거 그냥 넘어가도 돼?”를 지나 “누구한테 알려야 하지?”가 입 밖으로 튀어나오곤 했다. 내 속을 상하게 한 그 감정을 밖으로 꺼내서 책임을 물어야 할 대상을 향해 던지고 싶어 했다. 물론 나는 비겁한 사회적 동물이라 매번 그렇게 행동하고 살 순 없었다. 그렇게 간신히 터지지만 않을 정도로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화는 아무리 잘 간수하더라도 티가 났다. 남들이 품 속에 풍선을 숨길 때 나는 애드벌룬처럼 들고 다니는 셈이었으니까. 어쨌든, 화를 낼만한 일이니까 낸다고 생각했다.


나는 술에 취해 동기에게 인신공격에 가까운 막말을 쏘아댔던 정신 나간 선배에, 상사가 퇴근 후 영화 보는 데 따라가 줘야 한다는 친구 회사의 구시대적인 사내 문화에, 또 다른 친구에게 빌린 돈을 안 갚는 뻔뻔한 전 남친에 내 일처럼 분노했다. 뉴스를 보면서는 더 자주, 크게 화를 냈다. 지난해 n번방, 손정우 미국 송환 거부, 박원순 시장 성추행 등이 연달아 터질 땐 타노스가 되고 싶었다. ‘손가락 한번 튕겨서 이 부조리에 가담한 자들을 모두 다 가루로 만들어버릴 수만 있다면...’ 최근엔 정인이 이야기로 울분이 치밀었다. 신고의무자들이 의무를 다 했음에도 학대받는 아이를 살릴 수 없다면 그 사회는 그냥 망한 게 아닌가. 그 외에도 뭐 소소하게 “요리에 서툰 남편이 먹을 밥 지어두는 게 임신 말기 꿀팁이야?(출처 서울시)” “아니, JTBC ‘슈퍼밴드’는 또 남자 지원자만 받아?”같은 화는 하도 자주 생겨서 면역이 된 듯도 하다. 세상엔 말도 안 되는 일이 너무 많다. 봐봐, 다 화내야 할 일이 맞잖아?


어떤 화는 분명 유용하다. 내가 당한 일에 누군가 나보다도 더 열을 내주면 마음이 좀 나아지기도 한다. 굳이 화를 낸 덕분에 불이익을 피하거나 부조리를 바로 잡은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니다.(<스위트홈>에서 은유가 그랬다. “사람들은, 지랄을 존-나게 해 줘야 알아들어.”) 또한 대부분의 진보적인 사회 변화는 ‘화를 내 마땅한’ 사람들이 각성해서 화를 내기 시작했을 때 이뤄졌다. 기자라는 직업도, 화가 없으면 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렇구나” “그럴 수도 있지..”가 아니라 “아니 ㅅㅂ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의 자세가 필요한 일. '화'가 없다면 문제도 안 보인다. 문제를 알게 돼도 간섭하고 바꾸기 위해 노력할 필요를 못 느낀다. 우리는 어쩌면, 늘 나보다 더 적극적으로 화내는 사람들에 빚지며 살아가고 있다.


문제는 내가 내는 화가, 나쁜 일을 겪은 친구에게 위로가 되지도 업무의 원동력이 되지도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는 데에 이바지하지도 않을 때다. 하는 일이라곤 내 미간에 주름을 늘리는 게 전부인 화도 있다. 이 세상의 부정적인 에너지 총량을 늘리기만 하는 화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엔, 따지고 보면 ‘화’가 아닌 감정도 섞여 있다.


나는 언제부턴가 내 팀이 야구를 못해서 속이 상해도 화를 내고, 슬퍼도 화를 내고, 막막하고 안타까워도 화를 내고, 자기 연민에 빠져도 화를 내고, 정의감이 끓어올라도 화를 냈다. 때론 음식이 너무 맛있어도 화를 냈다. (“미친 이거 왜 이렇게 맛있어!”) 최근엔 이사 갈 집을 구하고 있는데 역시나 화의 연속이다. 깔끔한 신축이라면서 굳이 벽돌 느낌으로 깔롱을 부린 거실 벽, 반짝이는 큐빅으로 뒤덮인 방 문, ‘올 수리’를 했다면서 비비드한 원색 타일로 포인트를 준 화장실 등을 만나면 그냥 좀 낙담하고 그 집에 안 가면 그만이다. 근데 자꾸 화가 나는 것이다. ‘집 지으면서 아무 멋도 안 부리는 게 그렇게 어려운 걸까? 기본만 하면 되는데, 기본만? 이러니까 사람들이 자꾸 있는 걸 다 뜯어내고 인테리어를 새로 하잖아? 뜯겨서 버려지기 위해 만드는 건가? 자원 낭비잖아?’


나는 잔잔한 호수처럼 살 수 있는 사람이 못 된다. 화는 내 마음에 밴 오랜 습관이기도 하고, 때론 나를 움직여 앞으로 나아가게 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화내는 엔진을 너무 아무 때나 가동해 연료를 낭비하고 싶진 않다. 매사에 투덜거리는 할머니로 늙고 싶지도 않다. 그러려면 이제부터라도 ‘내지 않아도 될 화’를 내고 있진 않은지, 웬만한 건 죄다 ‘화’로 퉁치면서 내 감정에 무뎌지고 있진 않는지, 화내는 방식이 너무 자기 파괴적이진 않은지도 돌아볼 일이다. 그러다 합당하게 분노해야 할 일에 맞닥뜨렸을 때에도, 우아하게 화를 내고 싶다. 그래서 쓴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 이해할 수 없는 현상, 당연한 듯 벌어지지만 결코 당연하지 않은 이야기들에 대해서.


화를 글로 눌러 적는 동안은, 그 화를 감정 덩어리가 아닌 글의 소재로 대하게 된다. 이 ‘화’가 누굴 향하는지, 이렇게 활자를 할애해서 정리할 만한 내용인지, 화내는 근거가 시대 감수성에 맞는지, 사실 관계에 틀린 부분은 없는지 꼼꼼하게 살펴보게 된다. 나는 종종 말도 안 되는 화를 내는 사람이기도 하고, 말도 안 되는 글을 쓰는 건 죽기보다 싫어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후자를 잘만 이용한다면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정의를,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화를 내고 있는지 끊임없이 점검하고 그 화를 차분히 기록으로 배출하며 내 정신 건강을 지키고 싶다.


어차피 화를 낼 거라면, 화를 잘 다루는 사람이 될 테다. 이건 그를 위한 연습이다. 이제 막 시작해서 당연히 미숙하다. 그래도 계속 시도하려고 한다. 험한 말 없이, 논리 정연하게, 나의 문장이 누군가에겐 위로가 되고 누군가에겐 고된 싸움의 근거가 될 수 있도록, 꾹꾹 눌러 담아서, 우아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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