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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진 Jan 19. 2021

여자의 적이 여자였으면


-영화 <조이럭클럽>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팟캐스트 마작하는 여자들, 조이럭클럽’ - 안녕하세요, 조이럭클럽입니다 편에서  풍부한 이야기를 들을  있습니다. (들으러 가기)



팔리듯 시집 온 어린 며느리가 아이를 못 갖는다고 구박한다. 겁탈 당해 임신한 딸을 집안의 수치라며 손가락질하고 내친다. 부잣집 첩으로 들어가 아들을 낳았더니 대를 잇게 한다며 빼앗아 간다. 모두 영화 <조이럭클럽> 안에서 여성이 여성에게 저지른 짓들이다. 그래서 이 영화가 여성이 여성을 억압하고 괴롭히는 내용이냐면 전혀 그렇지 않다. 앞서 언급한 사건들은 영화 속 여성들이 자연스레 연대하고 다음 세대를 구원하는 데에 앞장서는 이유가 된다. 여자가 여자의 적이 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세상에서, 여자는 여자를 도와서 앞으로 나아간다.


에이미 탄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조이럭클럽>은 1940년대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 간 네 명의 중국 여성들과 그 딸들의 이야기다. 다시 말해, 주요 등장인물이 여성만 여덟 명이다.(1993년 할리우드 개봉작에서, 동양인 여성으로만!) 네 모녀가 겪는 각기 다른 종류의 갈등은 가부장제라는 씨앗에서 얼마나 다양한 불행이 자라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딸 세대가 겪는 고통은 어머니 세대에 뿌리를 두고 있고, 어머니 세대의 고통은 그들의 어머니 세대가 남긴 상처다. 20세기 초, 여성 혐오가 극에 달한 가부장제로 인해 3대가 줄줄이 고구마처럼 시달리는 이야기. 그럼에도 이 영화를 보며 절망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가부장제의 아픔을 다루는 방식이 세대를 거치면서 명백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어머니 세대는 가부장제에 목이 졸리며 살았다. 그저 살기에 바빴다. 어린 딸을 물건처럼 시댁에 팔아야 했고, 자신을 강간한 남자의 집이라도 첩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러다 결국 아편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어머니 세대도 녹록지는 않았다. 시대의 아픔도 겹쳤다. 전쟁 통에 쌍둥이 딸을 안고 나선 피난길에서 끝내 아이들을 포기했다. 난봉꾼을 만나 덜컥 임신하고 결혼했지만 그 결혼엔 애정도 존중도 없고 폭력은 있었다. 그래도 어머니 세대는 그 굴레에서 가까스로 도망쳐 나왔다. 미국 땅으로 건너와 서로를 찾았고, 마작을 치며 연대했다. 서로의 이야기를 속속들이 알고 지내며 비밀을 지키고 도움이 필요하면 도왔다. 이민 2세로 자란 딸들은 완벽한 미국식 영어를 쓰고, 자유로운 사고를 하고, 일을 하고, 백인 남성과 사랑을 하기도 한다. 스스로 어머니와는 다르다고 믿는다. 그러나 자기도 모르는 새에 이전 세대의 가치관을 답습하고 그 안에 갇혀 있다. 스스로가 자유롭다 믿기에 더욱 인식하기 어려웠던 그 견고한 틀에, 어머니들이 나서 금을 내준다.


이처럼 세대를 거치며 여성 개개인은 조금씩, 아주 조금씩 억압을 벗어난다. 스스로의 노력에 더해, 다른 여성-어머니를 포함한-의 도움이 존재했다. 그래서 이 과정은 여성 서사의 발전을 상징하는 것도 같다.


어머니의 어머니 세대엔 이야기가 없었다. 그들은 서로를 모르고, 그러니 대화를 하지 않고, 그저 상황에 순응한다. 어머니 세대는 서로를 알아본다. 외롭게 떠나온 이국 땅에서 연대를 구축하고 친구가 된다. 딸 ‘준’이 세상을 떠난 어머니 ‘쑤이엔’을 설명할 말을 찾지 못하고 “엄마는 그냥 엄마”였다고 하자, 남은 세 어머니는 “네 엄마가 얼마나 똑똑하고 친절하고 요리도 잘하고 노래도 잘했는 줄 아니?”라며 입을 모은다. 그들 사이에 많은 이야기가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그다음 세대인 딸들은 그저 친하게만 지내지 않는다. 또래 커리어우먼인 ‘준’과 ‘웨벌리’는 식사 자리에서 일 얘기를 하며 살벌하게 싸우기도 한다. 이 싸움은 두 사람이 여성이라는 사실과 무관하다. 그저 일하는 필드가 겹치는 두 사회인의 갈등이고 경쟁이다. 여성 서사가 ‘여성성의 서사’를 넘어섰음을 보여준다.




여자들이 더 많이 싸웠으면 좋겠다. 시집살이나 고부갈등을 말하는 게 아니다. 여성들이 다양한 영역에서 서로를 더 많이 발견하고, 의견을 나누고, 충돌하고, 미워하고, 이겨 먹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그러다 성장하면 좋겠다. 선역도 악역도 여성인 콘텐츠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남자들이 수백 수천 년 동안 숨 쉬듯이 해 온 것처럼 말이다.


소위 말하는 ‘여적여’ 프레임은 여성들끼리의 싸움 자체가 적기 때문에 생겨났다. 싸움이라는 건 주어진 역할이 있고 입장이 있어야 시작되는 건데,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여성들에겐 그조차 없었다. 그렇다 보니 여자가 여자를 경계하는 건 그저 ‘나의 여성성에 위협이 되기 때문’ 일 거라는 얕은 사고가 탄생했나 보다. ‘저 여자가 나보다 매력이 있어서 같은 이성을 두고 경쟁할 때 위험하겠다’는 판단이 아니면, 여자가 여자를 미워할 일이 없을 거라는 납작한 인식. 그러나 여성들은 ‘여적여’ 같은 한심한 프레임에 장단 맞춰줄 정도로 한가하지 않았다. 약자의 위치에서 오랜 역사를 보내면서, 오히려 필연적으로 연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우린 ‘여적여’ 공격을 ‘여돕여’로 막곤 한다. 여자는 여자의 적이 아니며, 우린 서로 연대하고 돕는 존재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여성들은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도 다른 여성을 돕고 있는 경우가 많다. 여성의 불편과 곤란은 여성에게만 유독 잘 보이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자기보다 예쁜 여자 싫어하잖아.”만큼 완벽하게 뒤틀린 환상도 없다. 여자들, 예쁜 여자에 환장한다.. 만약 누군가의 아름다움이 그를 ‘적’으로 삼는 이유라면, 외형의 아름다움에 가짜 권위를 부여한 남성 중심 사고가 문제의 원인이다. 그런데 이런 이유로 “여적여는 틀렸어! 우린 서로 미워하지 않아!”라고 해명하듯 말하다 보면, 덫에 걸리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왜 우리에겐 서로를 적으로 삼을 자유가 없는가. 왜 우리는 싸우면 안 되지?


세상의 역사는 남자들의 싸움의 역사다. 우두머리 자리를 싸워서 쟁취하고, 왕위를 놓고 형제끼리 싸우고, 땅을 따먹겠다고 전쟁을 한다. 모든 문학 작품 속 많고 많은 남성 서사 속에서 ‘적’은 필수 요소였다. 그 안에서 남자들은 허구한 날 정의, 돈, 꿈, 신념, 여자 등을 놓고 싸우고 증오하고 찌르고 죽인다. 그러나 누구도 그 관계를 ‘남적남’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회사에서 남자 직원들끼리 치고받고 싸워도 ‘남적남’ 소리는 안 나온다. 여자 직원들이 약간 아니꼬운 시선만 주고받다 들키면? ‘여적여’ 소리 듣는 건 시간문제다. 그 시선에 어떤 배경이 있는지는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여성들간의 부정적 커뮤니케이션은 그저 시기나 질투로 뭉개버린다.


여자의 적이 여자였으면 좋겠다. 여성이 언제나 여러 의미에서 누군가의 적일 수 있고, 타인을 적으로 여길 수도 있길 바란다. 여자들끼리라고 해서 미움, 증오, 갈등, 경쟁이 없을 리 없다. ‘여자’라서 시기하고 질투하는 게 아니라, 목표가 같으면 경쟁할 수 있고 신념이 엇갈리면 싸울 수 있다. 갈등의 양 축이 모두 여성인 상황이 이례적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여성들끼리의 건강한 싸움이 많아진다는 건, 연대할 대상도 많아진다는 뜻이다. 여성에겐 다른 여성과 좀 껄끄럽게도 지내고 원수가 되기도 할 자유가 필요하다. 그런 자유가 있을 때 여성 연대는 더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다. 그냥 각자의 자리에 있다가, 가끔은 싸우기도 하다가, 누군가 정말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 망설이지 않고 나서면 된다. 남자들은 침묵하는 바로 그 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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