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팟캐스트 ‘마작하는 여자들, 조이럭클럽’ - 조이럭클럽이 사랑한 여성들 편에서 더 풍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들으러 가기)
나에게 김연아는 언니다. 교정기도 떼지 않은 채로 주니어 무대를 휘젓던 시절부터 그랬다.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사람이 그 정도 능력 있고 멋있으면 언니다. 언니 사랑해요. 기후 위기와 전염병을 안고 가야만 하는 이 시절에 지구에 태어난 게 서럽다가도, ‘아냐 내 인생엔 연아 언니의 올림픽이 두 번이나 있었잖아’ 하며 위안을 삼는다. ....진짜다.
나는 김연아의 대체로 모든 것이 좋다. 이름도 목소리도 말투도 음악과 의상을 고르는 센스도 세상사 해탈한 듯한 평정심도. 오랜 시간 정상의 자리에 머물면서 보여준 애티튜드도 늘 좋았다. 과하게 겸손하지 않으면서도 절대 자기를 과시하는 꼰대가 되지 않았다. 한 방송에서, 피겨 후배들에 대한 기대를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아니다, 내가 뭐라고.”라고 멈춘 게 화제가 됐었다. 김연아만큼 성공한 사람이 같은 길을 걷는 후배들에게 함부로 조언하지 않으려는 모습이 낯설었고, 낯선 만큼 좋았다. 하지만 내가 그보다도 더 마음에 담아두었던 김연아의 워딩은 따로 있다. 인터뷰어가 자신을 대단한 ‘아이콘’이나 ‘예술가’로 표현할 때마다 꺼냈던 답변. “저는 그냥 운동선수예요.”라는 말이다.
겸손한 답변이어서가 아니다. 맥락 상 겸손을 표하는 목적이긴 했지만, 이 말은 결과적으로 김연아 자신을 높인다. 김연아는 운동선수일 때 가장 위대하니까. 내겐 그 말이 스스로 중심을 잘 잡고 있으며 자신의 가치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의 여유로 들렸다. 물론 김연아가 올림픽 챔피언이라는 타이틀에만 가둬두기엔 너무 커다란, 복합적인 아이콘이 되었다는 건 안다. 한때 그가 광고하는 물건만으로 하루 일과가 가능했을 정도이고, 평창 동계 올림픽 유치를 위해 애쓴 프레젠터이기도 했고, 이 나라 초등학생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김연아의 전성기를 지켜본 사람들은 마음속에 저마다의 김연아를 품고 있겠지. 그 많은 김연아 중 내가 가장 사랑하는 김연아는, 김연아가 스스로 생각하는 김연아. 빙판 위에서 가장 빛났던 피겨 스케이팅 선수, 체육인 김연아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한없이 증폭되는 상황이 몇 가지 있다. 아끼는 대상이 가진 것에 비해 불이익을 받는다고 여겨질 때가 그중 하나다. 능력으로 보면 훨씬 더 나은 보상과 대접을 받아 마땅한데 결과가 그를 못 따라줄 때.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하고, 듣지 않아도 될 말을 듣고 있는 것 같을 때.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마구 샘솟으며 더 큰 애정으로 이어지곤 한다.
내겐 운동선수 김연아가 그런 대상이었다. 김연아는 선수 생활을 하며 조금씩 꾸준히 다양하게 손해를 봤다. 국제빙상연맹은 김연아의 독주를 막기 위해 채점 기준을 야금야금 수정했다. 한일 또래 소녀 대결 어쩌구 프레임 때문에, 실력 격차가 한참 벌어진 뒤에도 아사다와 라이벌로 불려야 했다. 나라에서 받은 건 거의 없으면서 너무 많은 걸 해줬다. 김연아가 은퇴를 번복하고 올림픽 시즌을 소화하며 출전권을 확보한 덕분에 두 명의 후배가 소치에 갈 수 있었다. 그렇게 출전한 두 번째 올림픽에선 금메달을 도둑맞았다.
물론 김연아는 자신에게 주어진 핸디캡들을 보란 듯이 극복하며 살았다. 채점 상 불이익을 아무리 받아도 동메달은 목에 걸었고(출전했던 모든 대회에서 시상대에 오르는 ‘올 포디움’을 기록했는데, 이는 여자 싱글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다), 세계 신기록을 밥 먹듯이 갈아 치웠으며, 한국에서 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선수로 여전히 칭송받고 있다. 이 정도면 됐지 뭐가 그렇게 아쉽냐고? 실력에 비해서는 충분하지 않아서다. 그가 받아온 모든 인정이 부족할 정도로 대단한 선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압도적인 체육인을 우리가, 이 나라의 매체들이 어떻게 소비했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김연아가 막 국제 대회에서 입상하며 피겨라는 종목을 알리고, 사람들 눈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던 고등학생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그 당시 김연아는 정말 ‘귀여운 어린 여자애’ 취급을 받았다. 피겨가 편한 옷을 입고 거칠게 움직이며 땀 흘리는 종목이 아니어서일까. 때론 ‘운동선수’라는 사실도 잊히는 것 같았다. 연아가 무슨 아이라이너를 쓰는지, 화장은 누가 해주는지, 성형을 했는지 안 했는지, 어떤 치아 교정을 한 건지 등이 화제가 되었다. 언론은 자꾸만, 김연아를 운동선수가 아닌 배우 문근영, 원더걸스 소희와 같은 연예인들과 묶었다. ‘국민 여동생’이라는 타이틀 속에는 ‘썩 장하고 기특하지만 나이에 맞게 순수하고 겸손한 여성’이길 바라는 어른들의 왜곡된 바람이 담겨 있었다. 김연아의 나이가 실제로 어렸고, 우리가 알 만한 피겨 선수가 김연아 이전에 아무도 없었다는 건 다 핑계다. LPGA 무대를 개척하고 ‘맨발 투혼’을 보여준 박세리가 스무 살 언저리였지만, 아무도 박세리를 그렇게 취급하지 않았다.
피겨는 날개도 없는 인간이 공중에 뛰어올라 세 바퀴씩 돌고 떨어져야 하는 운동이다. 보통 사람은 가만히 서 있기도 어려운 얼음 위를 자유자재로 흘러 다니는데, 모든 움직임을 음악에 맞춰 컨트롤해야 한다. 결코 만만한 스포츠가 아니라는 말이다. 김연아가 스스로 운동선수임을 잊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이 다 헤아리지 못하는 노력을 본인은 알고 있기 때문일 거다. 자기 몸을 완벽하게 통제하기 위해 반복하고 또 반복하며 훈련했던 체육인의 노력을 말이다. 김연아는 그렇게 ‘운동선수’로 경기에 나서는데, 때론 평생 노력해서 일군 퍼포먼스보다 표면적인 아름다움이 더 조명을 받곤 했다.
피겨 해설부터가 그렇다. ‘아름다움’에 초점이 과하게 맞춰져 있다. 김연아 경기 중계방송을 보면 “어우... 너무 아름답죠?”가 절반이다. 기술 얘기는 주로 ‘성공’이냐 ‘실패’냐에만 집중해서 한다. 성공하면 환호하고, 넘어지면 “괜찮습니다!”라고 외친다. 스포츠 해설이 아니라 대국민 응원 방송이다. 물론 피겨의 채점 기준에 ‘예술성’이 있긴 하다. 선수가 음악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얼마나 전달력 있게 프로그램을 표현하는지를 평가하는 영역이다. 김연아는 늘 예술 점수에서 고득점을 했던, 예술성이 뛰어난 선수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피겨 팬들이 전문가의 입으로 듣고 싶은 건 기술 수행에 대한 코멘트다. 심사위원의 주관이 개입하는 예술 점수와 달리 잘하고 못하고의 기준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방금 김연아가 넘어지지 않은 건 알겠는데, 그 외에 어떤 점을 잘했는지를 알고 싶었다. 점프할 때 엣지를 어떻게 썼는지, 도약하는 타이밍은 어땠는지, 김연아가 하면 쉬워 보이는 저 자세를 다른 선수들은 왜 함부로 따라 하지 못하는지, 또 지금의 김연아가 과거의 김연아보다 어떤 점이 더 나아졌는지를 말이다. 코트 밖에서 끊임없는 대상화에 시달렸던 ‘미녀 테니스 선수’ 샤라포바도 서브를 꽂고 공을 받아치는 순간에는 그저 운동선수였다. 김연아는 본업인 운동을 하는 동안에도 국민들의 염원을 어깨에 짊어지고 춤추는 예쁜 인형 같았다.
김연아는, 그리고 김연아의 연기는 물론 아름답다. 그 자체로 정교하게 다듬어진 예술 작품을 보는 것 같다. 운동 경기가 이토록 예술적일 수 있는 이유가 뭘까.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운동을 너무 잘해서다. 김연아가 워낙 ‘클린’을 자주 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데, 피겨는 원래 선수들이 정말 많이 넘어지는 스포츠다. 그만큼 점프는 위대한 과업이다. 대부분의 선수들은 이 과업을 수행하기 직전마다 잔뜩 긴장하고 집중하면서 속도가 느려진다. 김연아의 연기가 ‘예술의 경지’로 보이는 이유는, 어려운 기술을 앞두고도 속도를 줄이거나 티가 나게 멈칫하지 않고 물 흐르듯 이어가기 때문이다. 동작과 동작 사이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김연아가 어마어마한 테크니션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국제빙상연맹 기술 세미나에서 참고 자료로 활용할 만큼 교과서적인 점프를, 보는 사람들이 불안해할 틈도 주지 않고 가뿐히 뛰어 버린다. 덕분에 경기를 지켜보는 우리는 ‘이건 점프, 이건 스핀, 다음 차례는 스텝, 이것은 스포츠.’ 같은 인식을 하지 못하고 몰입할 수 있다. 그 어려운 걸 해내는 대가로는 김연아가 받았던 그 어떤 점수도 충분하지 않았다.
연아 언니는 그렇게 실력 하나로 세계를 씹어 먹는 사람이었는데, ‘미모’, ‘여신’, ‘몸매’ 같은 단어들은 눈치도 없이 자꾸만 따라붙었다. 은퇴한 지금도 마찬가지다. 요즘 단골 멘트는 ‘은퇴 후에도 변함없는 미모’다. 운동선수한테 변함없다는 말을 쓰려면 체력이나 근육량 얘길 해야지 도대체 미모가 왜 튀어나오냔 말이야. 김연아가 그만 예쁘면 아주 큰일이 날 것만 같다. 김연아가 매력적인 사람이고 사랑받는 광고 모델임은 분명하지만 이런 식의 시선은 불편하다. 여성을 대상화하는 방식이며 체육인 김연아를 왜곡시키기 때문이다.
최근 온라인에서 화제가 된 게시물이 있었다. ‘김연아도 화보에서 무조건 보정한다는 부위’라는 제목이었다. 촬영 현장에서 찍은 사진에는 김연아의 종아리 근육이 봉긋하게 솟아 있는데, 공개된 화보 결과물에선 운동이라곤 한 번도 안 해본 사람처럼 종아리가 가늘고 매끈하게 만져져 있었다. 그 게시물의 요지는 ‘김연아가 은퇴를 하고 나서도 화보에 방해가 될 정도로 탄탄한 근육을 유지하고 있다’였다. 댓글도 ‘김연아 멋지다’, ‘대단하다’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근육이 화보에 방해가 된다’는 전제에 있다. 스포츠 웨어 화보였다. 김연아의 열렬한 팬이거나 운동을 정말로 즐겨서 그 옷을 구매하는 여성이라면, 김연아의 다리 근육이 거슬릴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당 브랜드에서는 마르고 가녀린 몸이 마케팅 효과가 더 크다고 판단한 거다. 그게 보편적인 2030 여성들이 원하는 몸이라고 믿으니까.
그저 묻고 싶다. 남자 운동선수의 팔 근육을 어제 헬스장에 처음 온 사람처럼 말랑하게 지우는 경우가 있냐고. 운동선수의 정체성을 살린 화보를 찍으면서, 보편적이라고 믿는 그 아름다움에 김연아를 꼭 구겨 넣어야 했냐고. 나이가 들어도 눈가와 목가에 주름 하나 없고, 운동을 그렇게 해도 팔다리가 울퉁불퉁해지지 않는 몸은 포토샵 안에만 있다. 우리는 나이에 따른, 직업과 상황에 따른 여성의 몸의 변화를 폭넓게 인정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일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다. 그 피해의 대상으로는 ‘여성’ 김연아도 예외가 아니다. 그리고 이런 세상 속에서, 내가 사랑하는 ‘체육인’ 김연아는 여전히 조금씩 과소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