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퇴사자의 변
구직자가 되어 보기도 전에 ‘백수’라고 불렸다. 성이 ‘백’이고 이름 첫 글자가 ‘수’인 탓이다. 초등학교 때부터였다. 짓궂은 남자 애들이 어디서 ‘백수건달’이라는 말을 주워듣고 놀리는 통에 사전을 찾아보고 울기도 했다. 그런데 말이란 게 웃기다. 하도 불리다 보니 어느새 단어의 의미는 날아가고 소리만 남았다. 중학교에 들어선, 서로 서먹한 단계를 넘기기만 하면 모두가 나를 “백쑤~~~”라고 불렀다. 더 이상 싫지 않았다.
직업이 없다는 게 얼마나 팍팍한 일인 지 잘 아는 어른이어서였을까. 나를 유독 아끼던 중2 담임 쌤은 그 별명을 웃어넘기지 않았다. “백쑤 백쑤~”하며 날 부르는 소리를 듣곤 깜짝 놀라서는 친구들을 꾸짖곤 하셨다. “친구한테 백수가 뭐니?” 그리고 대안도 제시했다. “‘백수’ 말고 ‘백 교수’라고 불러줘라.” 감사하게도 나의 가능성을 매우 높게 쳐주시는 분이었다.
선생님의 기대와 달리... 아마도 이번 생에 교수님이 되긴 글렀다. 고등학교에서도 대학교에서도 이름보다 ‘백쑤~’로 더 많이 불렸으나 선생님의 우려와도 달리 청년 백수가 되진 않았다. 아주 빠르지도 않았지만 많이 늦진 않게 방송국 기자가 됐다. 이런저런 타협 끝에 찾은 나름대로 꿈의 직업이었고, 그중에서도 가장 들어가고 싶던 회사였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내 적성을 의심하고 ‘이 짓을 몇 년이나 할 수 있을까’하는 자괴감에 빠지기까지 2주도 걸리지 않았다.
그래도 꾸역꾸역 다녔다. 하루도 우왕좌왕하지 않은 날이 없었지만, 사람을 만나면 꺼낼 명함이 있어 다행이었다. 선배에게 매일 깨져도 어머니에겐 자랑이라는 점은 위안이 됐다. 씀씀이는 월급에 맞춰 길들여졌다. 매달 시원하게 빠져나가는 카드 값은 직장인의 원동력이다. 같은 일을 오래 하면 일 근육이 생긴다. 운동할 때 틀린 동작을 반복해도 엉뚱한 자리에 근육은 붙듯이, 일을 아주 잘해야만 일 근육이 붙는 건 아니다. 완성도와는 별개로 어떻게든 정해진 시간에 주어진 일을 끝내는 법을 익히게 된다. 매너리즘이 이런 건가 싶었다. 물론 가끔은 끓어오르는 마음으로 몰두했고 보람도 느꼈다. 대체로는 막막했다. 그렇게 5년이 갔다.
좀 더 열심히 공부해서, 한 분야를 끈기 있게 파고 들어서 선생님 말씀대로 ‘백 교수’가 되어야 했나. 그럼 지금보다 행복했을까? 그건 알 수 없다. 되어 보지 않았으니까.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건, 이미 되어 본 이 직업은 나와 맞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대안을 찾을 때까지 버텨 보려다가 서른둘이 됐다. 난 집중력도 체력도 부족해서 회사를 다니면서 다른 길을 물색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걸 애써 부정했던 거다. ‘소녀는 자라서 기자가 되었습니다’라는 안정적인 엔딩. 이 엔딩이 꿈꿨던 만큼 ‘해피’하지 않아서, 내가 찍었던 마침표는 한참을 꿈틀거렸다. 그러더니 결국엔 꽁꽁 감아 두었던 꼬리를 늘어뜨렸다. 문장이 이어지길 기다리는 쉼표가 되었다. 이 사실을 인정하고 나니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관뒀다.
막막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내가 살면서 부딪혀 본 도전의 8할은 책상에 앉아 문제의 답을 찾는 시험이었다. 삶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관문에는 늘 시험이 있었고, 준비하는 시험이 뭐냐에 따라 나는 ‘외고 준비생’, ‘고3 수험생’, ‘취준생’ 또는 ‘언시생’으로 분류됐다. 멈춤이 곧 도전이 되는 건 새로운 경험이었다. ‘백수’가 되는 건 어쩌면 내 인생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신분의 변화였는데 아무런 시험도 없이 이뤄졌다. 이직도 유학도 시집도 아니고, 그저 백수가 되기 위해 퇴사하는 나의 결정을 대부분 신기해했다. “이제 뭘 할 거냐”는 질문을 수도 없이 받았지만 제대로 답은 못했다. 정말로 나도 잘 몰라서다. 더 늦기 전에 멈춤이 필요했을 뿐, 다음 단계를 정해놓진 않았다. 이제 내 앞에 놓인 시간은 많고 가능성도 여러 갈래로 열려 있다. 시험은 없다. 그래서 스스로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이 정도면 꽤 순도 높은 ‘백수’가 아닌가.
그러니까 현재까지 내 삶을 정리하자면, ‘소녀는 자라서 백수가 되었다’는 얘기다. 뭔 소린가 싶겠지만, 원하는 직장에 취업하기 보다도 ‘자발적 백수 되기’가 몇 배는 더 힘들었다. 열공하고 취뽀하고 5년간 사회생활도 해서, 비로소 ‘당분간 백수로 살기로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거다. 해도 해도 어려운 일을 꾸역꾸역 해 온 덕분에 하기 싫은 일을 더 이상 하지 않을 수 있게 된 아이러니. 그간의 노력과 자잘한 성취들이 모여서 꿈을 꿀 수 있는 자신감과 ‘바로 지금이어야 한다’는 확신, 저지를 수 있는 결단력이 되었다.
이제 나는 잠을 많이 잔다. 폰을 던져두고 한 시간씩 산책도 다녀온다. 단 1초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하루를 보낸다. 책이 읽고 싶으면 읽고, 글이 쓰고 싶으면 쓰고, 내킬 때마다 그림을 그린다. 못 만났던 사람들을 만나고 배우고 싶던 것들을 배운다. 몸이 지칠 만큼 힘든 하루를 보내도 걱정 없다. 내일 푹 쉬면 된다. 지금 당장 뭐가 되고 싶은지는 몰라도, 이젠 뭐든 될 수 있다. 새로운 일을 하는 나를 상상하며 행복 회로를 그려 본다. 외부의 압박 없이 내 안의 가능성을 편안히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이다. 내가 교수가 되길 바라셨던 선생님은 이렇게 행복한 백수도 있는 줄은 모르셨을 거다.
쌤... 저는 덕분에 잘 자라서 꿈 많은 백수가 되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