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도 걸어도」
"모든 행복한 가정은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기 나름대로의 불행을 안고 있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이 떠오른다.
사랑하면서도 상처를 주고받는 가족이라는 관계. 각자의 자리에서 제 몫을 다하지만 사랑의 외피를 두른 삶의 방식들은 쉽게 강요된다. 적당한 거리를 상실한 채 이해와 배려보다 고통과 상처가 낯익은 단어가 되고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영원한 타인으로 살아간다. 심지어 가족이기주의는 타인까지도 배척한다. 각자의 삶과 관계에 집중하며 밀도 있게 현실을 그려내는 가족이야기는 따뜻함 이면에 서늘함을 품고 있다.
의사로서의 자부심과 권위아래 소통에 서툰 아버지, 자식을 잃은 아픔을 묻어둔 채 성실한 아내와 엄마의 자리를 지키지만 가끔 웃으며 내뱉는 말들이 송곳 같은 어머니, 아버지를 미워하며 부침을 겪으면서도 닮아가는 아들, 곰살맞으면서도 자기 살 궁리만 하는 딸과 사위. 가족관계에서 배제되는 며느리와 데려온 아들.
큰아들의 기일에 모인 가족들은 제법 활력이 넘치는 듯하다.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고 추억을 나누면서도 뒤틀린 관계들은 여전히 서걱거린다. 아무렇지 않은 척 눌러놓았던 감정들과 비밀들이 서서히 드러나며 갈등이 심화되지만 언제나 그렇듯 또 묻힐 것이다. 활기찬 첫 장면과 스산한 마지막 장면은 삶과 죽음처럼 묘하게 대비를 이룬다. 굴곡 많은 지난한 삶을 이어가듯 힘겹게 계단을 오르는 노부부의 뒷모습도, 그들이 오르고 남겨진 텅 빈 계단도, 툴툴거리면서도 아버지가 걷는 속도에 맞춰주는 아들의 모습도 여운이 짙다.
큰아들의 산소에 다녀오는 길, 작은 아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노모의 모습에서 울컥 눈물이 쏟아진다. 부모의 자리를 물려받은 자식들이 질곡의 깊이만큼 부모를 이해하게 될까.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 여전히 관계를 좁히기 어려운 평행선이겠지만 삶의 모습들은 조금씩 닮아 있을 것이다. 삶이 죽음으로 이어지듯 저마다의 행복과 불행을 품은 채 인생의 바다는 유유히 흘러갈 것이다. 상실의 아픔을 품어내는, 다른 삶이 건네는 위로가 제법 묵직하다.
잔잔한 음악들과 고즈넉한 풍경들도 인상적이다. 또 다른 가족이야기를 어떻게 그려냈을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다른 영화들이 궁금해진다.
ps. 9년 전에 써놓았던 글이다. 부산의 어느 영화관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로 처음 만난 작품, 전작을 다 보게 된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