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온도, 이기주」
어제는 노트북을 켜고 '사람'을 입력하려다 실수로 '삶'을 쳤다. 그러고 보니 '사람'에서 슬며시 받침을 바꾸면 '사랑'이 되고 '사람'에서 은밀하게 모음을 빼면 '삶'이 된다. (132쪽)
나는 "따뜻한"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서늘한 마음과 몸이 온도가 불러들이는 단어. 무의식 적으로 또는 의식적으로 글이나 말속에 "따스한" 이란 단어를 쓴다. 보라색의 표지 위에 "언어의 온도"라는 제목이 시선을 붙잡는다. 아픈 사람이 더 아픈 사람을 알아본다는 마음을 흔들어놓는 문장들. 어루만지는 글들이 마음과 몸의 온도를 높인다.
수백 년의 시간을 견딘 석물(石物)은 틈을 만들어야 한다.(30쪽) 불가능한 일인 줄 알면서도 완벽하려 했던 내 오만과 열정의 찌꺼기들. 냉담한 감정들은 그곳에서 오지 않았을까. 기껏해야 백 년을 살까 말까 한 인간으로 틈 없이 산다는 건 무모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완벽을 추구하는 내 본성은 무슨 일을 완결한다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다. 심지어는 무슨 일을 착수하는 것조차 금지해 버린다.... 내가 뭔가를 이룬다면 그것은 결코 강한 의지의 산물이 아니라 도리어 의지가 빈약한 탓이다. 나는 통찰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일을 시작하게 되고, 그것을 멈출 용기가 부족하기 때문에 끝까지 가는 것뿐이다. 이 책은 내 비겁함의 결과다.(페루난 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완벽을 기하려는 본성은 나만의 문제만은 아닌듯하다. 단 하나의 영혼이라도 사로잡을 수 있을까, 자신 말고 또 다른 이가 읽어줄까 염려하던 페소아의 글은 지금까지 수많은 영혼을 사로잡고 있다. 멈출 용기를 내었다면 페소아의 글은 사라졌겠지.
잘 쉬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일을 할 때는 나의 모든 에너지를 소진하고도 뭔가 부족함을 느낄 만큼 아쉬움이 컸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시간은 그래서 불안을 가져온다. 심지어 죄책감마저. 베개를 베고 자세를 고쳐 누우면서 이번 주말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린 무엇을 중단하거나 멈추는 데 익숙하지 않다. '나'를 헤아리는 일에도 서툴다.(351쪽) 내가 멈추게 되면 내가 속한 삶의 컨베이어 벨트가 멈출 것 같은 불안. 작가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단다. 자신과의 싸움보다 자신과 잘 지내는 게 훨씬 중요하다고. 자신과 소통하기보다 사회가 원하는 인간상으로 어딘지 모르는 그곳을 향해 달려갔었다. 인생의 부침들은 나와 화해 하도록 만들었다. 자신을 안다는 것은 길을 잃는다는 것이라는 페소아의 냉소적인 조언이 잃어버려도 괜찮아,라는 말로 읽힌다.
참된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찾는 게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다~마르셀 프루스트. 여행은 도시와 시간을 이어주는 일이다. 그러나 내게 가장 아름답고 철학적인 여행은 그렇게 머무는 사이 생겨나는 틈이다~폴 발레리(277쪽)
떠나야만 여행인 것은 아니다. 일상 속에서 다름을 발견한다면 그 또한 여행일 수 있다. 프루스트가 말했던 새로운 눈, 발레리가 말한 틈은 그런 게 아닐까. 감각과 상상력이라는 감수성을 키우지 않고 여행의 해방감을 느낄 수 있을까. 단조로운 자기 자신을 돌아다닌 것에 불과하다는 페소아의 일갈은 그래서 의미 있다. 살아간다는 것은 다른 존재가 된다는 의미다.(페루난 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어제 느낀 것을 오늘도 똑같이 느꼈다면 그것은 느낀 것이 아니라 기억해 낸 것이라고. 당연한 얘기겠지만 십 년 전의 나는 현재의 나와 다르다. 뇌과학자 김대식이 쓴 "인간을 읽어내는 과학"에서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내가 아니다,라는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명제를 소환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언어, 일상, 영화등에서 길어 올린 짧은 단상들이 긴 머무름의 시간을 준다. 분노의 감정이 가라앉을 때까지 걷고 걸으며 그곳에 누군가에게 화상을 입힐지도 모를 감정의 막대기를 꽂아두고 온다는 에스키모의 삶은 나를 돌아보게 한다. 아직도 잘 다스리지 못하는 분노의 찌꺼기들이 나이를 무색하게 하지만 그렇게 그렇게 나를 잃어가도 좋다면 그럴 참이다. 나에게서는 어떤 향기가 날까. 꽃 내음이 백 리까지 퍼지듯 사람의 향기도 만 리까지 간다는, 화향백리 인향만리라는 말처럼 묵직하고 그윽한 향을 남기는 사람이고 싶다. 매일 새로운 내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므로 내면의 향기를 응축하는 길로 걸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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