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정체성을 부여한다

「정체성, 밀란 쿤데라」

by 라벤더
무엇을 위해 사나요, 인생에 있어서 무엇이 본질적인 것인가요라는 당신 질문에 대한 답이 있는 곳으로. (156쪽)

어렸을 적에 많이 했던 종이인형놀이. 한 장의 종이에 속옷만 입은 인형, 다양한 옷과 장신구들이 인쇄되어 있다. 가위질을 유난히 좋아했던 나는 허구한 날 인형과 옷들을 오리고 하나의 인형에 여러 옷들을 바꿔가며 인형놀이를 했다. 쿤데라의 소설 "정체성"의 책표지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에는 옷은 있는데 얼굴이 없다. 옷을 바꿔 입히던 인형놀이와 다르게 본질이 사라졌다. 아니 어떤 본질도 가능하다. 정체성이라는 게 무엇일까. 내가 보는 나의 모습? 남이 보는 나의 모습? 정체성은 고정 불변일까, 변화무쌍할까. 변한다면 무엇 때문에?


샹탈은 현재의 자신을 사랑해 주는 장마르크를 잃을까 봐 두렵다. 현재를 무화시키고 과거의 나와 만나게 하는 혼란스러운 꿈이 두렵다. 페터 비에리의 "삶의 격"에서 자아상은 경험의 총체를 넘어서지 않는다고 했다. 경험이 변하면 자아상도 변한다는 것. 샹탈도 몇 번의 변화를 거쳤다. 다섯 살 난 아이의 죽음으로 순응적이었던 자아와 결별하고 현재의 장마르크를 만난다. 아이의 죽음이 자신을 자유롭게 했다고 말하지만 꿈은 무의식 속에 있는 죄책감을 들고 온다. 억압적인 현실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사랑하게 했던 아이의 부재는 세계를 사랑하지 않게 했다. 도피의 자유로움이었던 것. 아이를 잃었듯 장마르크의 사랑도 잃게 되리라는 상상에 괴로운 샹탈.


정체성은 타인의 시선에 의해 만들어지기도 한다. "남자들이 더 이상 나를 돌아보지 않더라"라고 말하는 샹탈의 속내는 젊음의 소멸에 대한 하소연이기보다 아빠화되거나 연을 날리는 남자들의 적극적 권태의 다른 모습이다. 가능성의 상실이 부르는 정체성의 소멸. 아무도 바라봐주지 않는 육체와 영혼은 정체성이 사라진다. 장마르크가 곁에 있어도 샹탈은 외롭다.


장마르크는 해변에 서있는 여자를 보고 손을 흔든다. 그런데 그녀는 샹탈이 아니다. 그토록 사랑하는 여자와 다른 사람을 혼동하다니, 샹탈의 정체성이 사라진 경험에 무력감을 느낀다. 다른 사람의 얼굴을 한 샹탈에게 잃어버린 정체성을 불어넣으려는 듯 꿈속에서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외친다. 사랑이라는 안정감안에서 상대의 정체성이 사라진 경험에 당황한 장마르크는 "남자들이 더 이상 나를 돌아보지 않더라"라는 샹탈의 하소연에 미지의 남자가 되기로 한다. 그때만 해도 자신의 작은 날갯짓이 어떤 폭풍우를 몰고 올지 모른다. 시라노라는 이름으로 샹탈에게 연서를 보내지만 낯선 이의 시선에 동요하는 샹탈을 보며 묘한 질투를 느낀다. 샹탈은 낯선 편지들의 존재를 장마르크에게 말하지 않고 장롱 속 속옷아래에 넣어 놓는다. 편지 속 찬사의 말에 부응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바꿔가는 샹탈.


쿤데라의 소설 "농담"에서 루드비크가 여자친구에게 보낸 농담한마디는 루드비크의 삶을 뒤흔들어 놓는다. 도미노처럼 그에게 학생, 자유, 꿈을 앗아간다. 배신의 순간에 여자친구는 침묵한다. 장마르크의 F도 친구들의 배신 앞에 침묵한다. F에게 우정이상을 바랐던 장마르크는 크게 실망하고 F의 죽음 앞에서 냉정하다. 친구였기에 침묵했다고 말하는 F. 자신이 보았던 F의 본질은 무엇인가. 십 초마다 닦아주지 않으면 볼 수 없는 눈. 우리는 눈꺼풀이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산다. 내가 보는 타인의 눈은 실은 눈꺼풀과 그 운동이다. 그렇다면 영혼의 창이라 불리는 눈으로 보는 타인의 모습이 본질 그대로의 모습일까. 그것을 믿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깜빡이는 눈꺼풀의 움직임을 잊어야만 한다.... 망각의 계약에 복종해야만 한다.(73쪽) 장마르크가 F의 눈의 깜빡임으로 본질을 보려 했듯 샹탈의 과도한 눈의 깜빡임으로 무언가를 옷장에 숨겨두려 했던 불안을 본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꿈을 말하지만 아이들의 호감에 관심 있는 사회인가. 사회의 평판이나 부모의 기호에 맞춘 진로를 은연중에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정체성에 대한 고민할 여유를 주지 않으니 아이들은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깨닫지 못한 채 편향적으로 진로를 선택한다. 대학을 가든 안 가든 성인이 되어 표류하는 것은 예고된 일. 청소년기에 고민할 문제들을 뒤늦게 맞닥뜨려 비로소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장마르크도 자기 인식 없이 선택하게 된 진로로 그의 인생에서 표류한다. 이렇게 세월을 허비한 뒤 무엇을 선택해야만 할까? 그의 깊은 내면은 예전과 다름없이 입을 꾹 다물고 있는데 무엇에 매달려야 할까?(77쪽) 마음에서 우러나는 호감을 가리는 이타적 이상주의는 정체성을 가리는 가면이 되고 학업의 포기와 함께 야심도 포기한다. 자기 인식이 없이 직업을 선택하니 직업에 무관심하고, 무관심이 균질화된 열정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가 아닐지.


샹탈은 자신을 설레게 하던 편지의 발신자가 장마르크임을 알고 런던으로 떠난다. 가능성의 나무를 선물하고 싶었던 장마르크의 비밀이 자신을 떠나려고 한 행동이라고 오해한 것. 오랜 친구 F를 삶에서 배제했듯 냉정하게 자신을 떠나리라는 두려움. 편지를 쓰기 위해 그녀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편지를 받은 그녀의 반응이 어떤지를 염탐하던 행위는 샹탈의 정체성에 대해 착각을 일으킨 자신의 권태를 자각하게 한다. 자신이 만든 환영에 설레는 샹탈을 보며 질투를 느끼지만 샹탈도 결국 본능을 가진 인간이라는 사실에 연민을 느낀다. 가능성의 소멸인 자신이 가능성의 나무를 선물했고 샹탈은 나무의 속삭임을 혼자 들으려 했을 뿐인데. 자신의 무관심 속에 방치되었던 샹탈이 정체성을 바꿔가듯 자신도 새롭게 찾아낸 그녀의 매력을 보며 새로운 사랑을 느낀다. 자신의 정체성도 변화를 맞는다.


우리의 유일한 자유는 회한과 쾌감 중 하나를 선택하는 데 있다고. 모든 것이 무의미한 것이 우리 운명이니 그것을 결점처럼 끌어안고 살지 말고 즐기는 법을 알아야만 한다.(158쪽)


사상의 잡거성(雜居性). 모든 사상은 나름의 가치가 있고 함께 공존한다는 사실에 매혹을 느끼게 된 샹탈은 장마르크를 생각한다. 덧없는 삶에 결점을 끌어안지 말고 즐기며 살라는 를르와의 말에 장마르크에 대한 사랑을 깨닫는다. 수없이 꾸는 악몽 속에서 샹탈에게 다가오기 위해 몸싸움을 벌이던 남자를 찾는다.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남자. 장자의 제물론 편에서 장주는 나비가 되는 꿈을 꾼다.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다니면서도 자신이 장주임을 알지 못한다. 문득 깨어 보니 장주가 되었다. 장주가 나비가 된 건지 나비가 장주가 된 건지 알 수 없다. 장주와 나비 사이에 무슨 구별이 있는가. 꿈이 자각하게 할 뿐 사물은 고정된 무엇이 아니라 서로 어울려 함께 한다는 물화(物化). 현실이 비현실로, 사실이 몽상으로 변했던 정확한 순간은 언제일까? 그 경계선은 어디에 있을까? (182쪽) 샹탈은 꿈에서 깨었지만 꿈인지 현실인지 모호하다. 그리고 몽환적으로 외친다. 망각의 깜빡 임대신 오롯이 당신을 바라보겠다고. 사랑하는 이에게 시선을 떼지 않는 것, 관심을 갖는 것은 정체성의 소멸을 더디게 하는 길이 아닐까. 릴케가 모든 아름다움이 소멸할 운명이라고 말한다 해도 말이다.


나는 더 이상 당신으로부터 눈길을 떼지 않을 거야. 쉴 새 없이 당신을 바라보겠어.(183쪽)



#정체성_밀란쿤데라_민음사 #르네 마그리트 표지 #페터 비에리_삶의 격 #농담_밀란쿤데라 #장자_제물론 #으아니 절판이라니 응? #읽고 쓰고 그림책수업하는 27년 전직 초등교사 #북샵라벤더 책방지기 #경주그림책서점 #경주독립서점 #경주읍성동네책방 #bookshoplavender #책방도 브런치도 하길 잘했다

이전 05화부끄러움을 아는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