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의 시작은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은 씨앗이었다

「랩걸, 호프 자런」

by 라벤더
어떤 부모도 자식들의 삶을 완벽하게 만들어줄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최선을 다해 그들을 돕는다. (329쪽)


나와 아들이 너무도 다르기 때문에 아들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지를 알아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아직까지도 그 답을 배우고 있는 중이다.(366쪽) 속마음을 들켜버린 듯한 기분. 큰아들은 내게 그런 존재였다. 한 인간을 이해한 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지만, 아이는 이해 경계밖에 있었다. 타인을 제대로 보기 위한 적절한 거리를 사랑과 집착으로 메웠다. 감정을 어루만 지기보다 해결책을 먼저 제시했다. "어머 속상했겠다. 아프지 않았어?" 어릴 적 내가 부모에게 그렇게 듣고 싶어 했던 말을, 정작 아이에게 아꼈다. 아니할 줄 몰랐다. 그러면서 아이 눈높이를 맞추며 키웠다고 믿었다니. 아들은 미숙한 엄마를 책과 더불어 자라게 했고, 지금은 서로의 삶을 존중하며 조심스럽게 조언을 건네는 동반자가 되었다.


아들의 꿈을 지지하고 믿고 지켜봐 주는 과정은 녹녹지 않았다. 아들의 선택을 믿었고, 믿음 아래 눌러놓은 욕심과 불안이 기어 나오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잊었다. 아니 잊는 척했다. 내가 살아온 세상보다 척박한 세상을 살아갈 자식이 조금은 덜 아프고 덜 힘들었으면 하는 게 부모맘일 텐데. 모든 시작은 기다림의 끝이다. 우리는 모두 단 한 번의 기회를 만난다. 우리는 모두 한 사람 한 사람 불가능하면서도 필연적인 존재들이다. 모든 우거진 나무의 시작은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은 씨앗이었다. (52쪽) 앞선 과학자의 발자국이 뒤따르는 과학자의 징검다리가 되었듯, 부모로 서의 삶이 징검다리가 되어줄 수 있으면 좋겠다. 우거진 나무의 시작이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은 씨앗이었듯, 잠재력을 발견하고 씨앗을 심어 자신만의 숲을 만들어가길.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우리 모두 일하며 평생을 보내지만 끝까지 하는 일에 정말로 통달하지도, 끝내지도 못한다는 사실은 좀 비극적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 대신 우리의 목표는 세차게 흐르는 강물로 그가 던진 돌을 내가 딛고 서서 몸을 굽혀 바닥에서 또 하나의 돌을 집어서 좀 더 멀리 던지고, 그 돌이 징검다리가 되어 신의 섭리에 의해 나와 인연이 있는 누군가가 내딛을 다음 발자국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272쪽)


"나무, 과학 그리고 사랑". 랩걸의 부제처럼 저마다의 세계를 가진 나무와 발견의 기쁨을 준 과학, 그리고 삶을 사랑하며 열정을 바친 과학자의 책이다. 남자 과학자들이 대부분인 세계에서 똘기로 충만한 그녀의 도전과 용기는 어느 것도 막지 못한다. 랩걸이라는 제목처럼 어릴 적부터 과학자 아버지 실험실에서 놀았고, 세상에서 제일 안전한 우주인 그곳에서 본모습을 찾는다. 모든 것이 자체적으로 조달되는 자급자족 시스템을 갖춘 곳이기 때문이다. 그 자체가 하나의 우주를 이루고 있다.... 바깥세상이 실험실로 들어올 수 없기 때문에 실험실은 내가 진짜 나일 수 있는 장소가 되었다. (36쪽)


과학자가 이렇게 말랑말랑한 글을 쓰다니 반칙이다. 아마도 그건, 세상에 식물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식물이 존재하는 세상에 우리가 존재한다는 시각, 세상을 식물의 입장에서 바라보며 식물의 행동을 이해하려고 했던 풍부한 감성 때문이리라. 때문이리라. 엄마는 책을 읽는 것도 일종의 노동이며, 각 문단마다 분투해야 한다고 가르쳤고, 나는 그런 식으로 어려운 책을 흡수하는 법을 배웠다.(30쪽) 실패를 통해 배움을 찾게 한 아버지, 고난이 도의 책을 읽게 도와준 어머니, 그의 현재는 혼자만 의 것이 아니다.


사람의 인연이란 게 노력한다고 이어지는 게 아니었다. 어차피 이어질 관계는 노력하지 않아도 계속된다. 노력해서 이어질 관계는 어디서든 삐걱댄다. 책과 글은 좋은 도피처이자 안식처가 되었고, 행복했다. 이야기하길 좋아하고 잘 웃는 날 외향적이라고 오해하는 지인도 있지만, 난 기꺼이 고독의 충만함을 선택하고 싶다. 말을 하든 하지 않든 온전히 자신답게 행동할 수 있는 존재, 모두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할 때 모든 것을 이해해 주는 친구가 있다? 빌은 호프 자런에게 그런 친구다. 들숨 날숨처럼 별다른 대화 없이도 마음을 읽어 낸다. 가족보다 더한 솔메이트다. 서로의 약점을 메우고, 과학자로서 함께 도전하고 성취한다. 책의 대부분은 남편과의 사랑이야기보다 빌과의 이야기로 채워진다.


사랑과 공부는 한순간도 절대 낭비가 아니라는 점에서 비슷하다.(251쪽) 아, 얼마나 위로가 되던지... 나는 항상 한발 늦다. 아니 열 발 늦다.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아내는 내게, 그래도 더디지만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응원을 보내는 듯하다. 교통사고로 죽을 고비를 넘기며 "죽지 않고 살아서 지나가는 것이 좋은 날"(233쪽)이라는 저자의 묵직한 통찰까지 닿을 수는 없다. 유리천장,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오롯이 자신의 삶을 개척해 간 성공한 여성 과학자의 자서전이지만 고군분투한 실패담이 가득하다. 살았던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떠나갈 평범한 이들의 발길을 비춰줄 따뜻하고 냉철한 조언은 울림이 크다. 세상은 그래도 살만하다.


큰 좌절에 대처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잠시 멈추고, 숨을 크게 쉰 다음, 마음을 가다듬고 집에 가서 그날 저녁은 다른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낸 후 날이 밝으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즉시 그 문제에 다시 몸을 던져 머리를 물속에 집어넣고 바닥까지 다이빙을 해서 그 전날보다 한 시간 더 일하면서 무엇이 잘못됐는지를 찾아내기 위해 애를 쓰는 것이다. 첫 번째 방법이 적절함에 이를 수 있는 길이라면, 두 번째 방법은 중요한 발견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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