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무늬들

「인간의 굴레에서, 서머셋 몸」

by 라벤더

# 단 한 사람의 힘

"땡큐"라는 토크쇼에서 표창원의 성장이야기는 인상적이다. 문제아였던 자신을 믿고 바르게 이끌었던 표창원의 어머니, 수업료를 못 낸 자신에게 욕을 하는 교사와 물건을 훔친 15세 아들을 경찰에 신고했던 신창원의 아버지. 말썽꾸러기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신창원과 결정적으로 달랐던 한 가지는 사람의 힘이었다. 자신을 끝까지 믿고 지지했던 진심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단 한 사람이라도 내 편이 있다는 건 작고도 큰 차이가 아닐까.

다리를 저는 불구의 몸,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사제인 백부의 집에 맡겨진 아이, 필립에게는 그 단 한 사람이 없다. 사랑받을 만한, 아니 존재 자체로 사랑받을 수 있음을 경험하지 못한다. 편하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 보일 존재가 없다는 긴장감은 불안, 수치심과 굴욕감을 증폭시킨다. 내적 허기는 끝없는 수렁을 만든다. 공허함으로 친구를 독점하려 하고 타인의 인정에 목말라한다. 에너지는 외부로 향하고 타인이 보이는 반응에 이리저리 휘둘린다. 인간과의 교감과 소통대신 외부의 힘에 순응하고 내적 에너지를 뺏기길 자처한다. 공허한 내면은 따뜻한 온기를 찾아서 표류한다.


# 삶의 주체성을 찾아서

필립은 교육과 종교의 억압이 답답하다. 전통과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강요당하는 교육, 무비판 적인 종교는 새로움을 추구하는 필립의 마음을 삐그덕 거리게 한다. 불구의 몸에 집착하던 비뚤 어진 자의식은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주인이 되지 못하게 만든다. 필립은 인생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피난처를 마련하고 있었다.(1권, 62쪽) 삶의 주체성을 찾고자 독서를 통해 내면으로 침잠하지만 그 또한 관념적으로 흐를 뿐 현실과의 괴리는 커져간다. 인간적인 사랑이 부족한 공간에 종교와 학업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 내적 에너지를 채우기 위해 방황했던 건 당연한 수순이 아닐까.


그는 넓은 세상으로 나가고 싶었다.(1권, 136쪽) 자기 뜻대로 살고 싶은 것이 당장의 절실한 소망이었다....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다.(1권, 139쪽) 필립은 외적, 내적인 현실의 굴레를 벗어나 돌파구를 찾아 나선다. 안락했던 과거의 습관들을 머지않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니 오싹 무서워졌다. (1권, 100쪽) 정규 교육제도를 떠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지만 그 또한 만만치 않다. 강요를 벗어나 자유를 찾아 떠나지만 어디에서도 온전한 자유는 없다.


세상이 왜 존재하는가, 인간은 무엇 때문에 존재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은 여전히 알 수 없는 것이었다. (1권, 434쪽)


# 좋아하는 것을 잘하지 못한다?

우연히 발견한 그림에 대한 재능을 펼치지만 가능성만큼이나 한계도 발견한다. 좋아하는 것을 잘하지 못한다는 자각. 많은 이들이 번민하는 문제가 아닐까. 천재성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자신만만하던 초반의 결기는 능력의 한계에 부딪쳐 소멸되어 간다. 잘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으며 살아가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호흡하듯 그림을 그려야만 살 수 있는 화가도, 글을 써야만 하는 소설가도, 음악가도 이성보다는 감성으로 그 일을 해내리라. 예술의 한계와 마주한 필립은 인간에 대한 관심과 연민, 자유에 대한 열정을 살려 의학을 공부한다. 재산을 탕진하고 생계를 위해 떠밀려하게 된 옷집점원생활은 더더욱 의학공부에 대한 욕망을 부추긴다. 환상에 빠진 현실도피적 인물, 무작정 꿈을 좇는 인물, 등 다양한 인물들을 만나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 수많은 굴레들

수렁 같은 밀드레드와의 사랑, 그 혼돈의 사랑은 바보스러울 정도로 비굴하게 사랑을 애원한다. 이성의 한계를 넘어버린 사랑의 정념은 치명적이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음을 알면서도 끝도 없이 베풀고 이용당하고 버림받는다. 자기 학대에 대한 음울한 쾌감(1권, 480쪽)을 사랑으로 혼동하며 고통을 자처한다. 극한의 고통으로 자기 연민을 느끼고 싶었던 페소아의 분신인 소아레스처럼. 조용한 거리를 정처 없이 떠돈다. 영혼과 육체가 피곤을 느낄 때까지 계속 걷는다. 내가 잘 알고 있는 그 극한의 고통이 나를 고통스럽게 할 때까지. 고통은 사람이 자신을 느끼는 것을, 그래서 막연한 모성애로 서글픈 자기 연민에 빠지는 것을 즐긴다.(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밀드레드와의 치명적인 사랑에 괴로워하면서도 벗어나지 못했던 건 내면의 결핍이 만든 내상의 그림자가 아닐까. 사랑받아보지 못했던 상처가 끝없는 연민과 집착으로 이끌고 혼돈의 사랑만이 진짜라고 믿는다. 우리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다. 우리는 오직 누군가에 대해서 우리가 갖고 있는 그 이미지를 사랑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상, 즉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밀드레드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는 필립. 그는 자신을 바라보지 않은 밀드레드의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긍정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노라의 사랑을 배신한다. 어쩌면 사랑은 모든 인과성과 이성을 떠나 온전히 감정의 지배를 받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성으로도 어쩌지 못하는 정념의 굴레 속에서 허우적대는 감정들.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사고하지만, 막상 행동의 순간이 닥치면 본능과 감정, 그리고 알 수 없는 어떤 힘에 사로잡혀 무력해지고 말았다. 마치 그는 환경과 성격이라는 두 개의 힘에 의해 조종당하는 기계처럼 행동했다. 그의 이성은 방관자처럼 사실을 관찰할 뿐, 무력하여 개입하지 못한다. 그것은 마치 천상에서 인간의 행위를 내려다보지만 현상을 조금도 바꾸지 못하는 에 피그로스의 신들 같았다. (2권, 130쪽)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필립이 많은 시도와 좌절 끝에 만났던 의학공부도 결코 쉽지 않다. 백부에게서 받아오던 지원금을 탕진하고 급기야 의학공부를 중단하게 된 필립은 인간의 참혹한 욕망을 드러내기도 한다. 실천하지 못할 것들을 설교하는 백부의 기만과 이기심을 비판하면서도 자신의 공부를 위해 백부의 죽음을 바라고 있던 자신의 이기심과 마주한다. 극한의 상황을 겪고 나서야 크론쇼가 말한 인간의 불가피한 이기성(1권, 353쪽) 자각하는 필립.



세상을 살 만한 장소로 만들기 위해 무엇보다도 우선 필요한 일은 인간의 불가피한 이기성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것을. 자넨 타인에게 이기적이 아니기를 요구하는데 그건 자네의 욕망을 위해 타인더러 자신의 욕망을 희생하라고 하는 모순된 주장이야. 타인이 왜 그래야 하나. 모든 개인이 세상에 살면서 자기 자신을 위한다는 사실을 자네가 받아들여야 자넨 다른 사람들에게 덜 요구할 수 있어. 다른 사람들에게 덜 실망할 거고, 다른 사람들을 더 자비롭게 바라볼 수 있어. 사람은 인생에서 단 한 가지를 추구하지. 그건 자기 자신의 쾌락이야. (353쪽)


# 삶의 정교한 무늬들

네덜란드의 숲 속에는 중생대 쥐라기 시대부터 살고 있는 "카우리"라는 나무가 있다. 2000년을 훨씬 넘은 세월의 흔적 앞에 고작 백 년의 삶을 살다가는 인간은 어찌 보면 잠깐 왔다 사라지는 존재가 아닐지. 필립은 장애와 애정결핍, 관습의 억압으로 외부의 자극에 끌려다니는 삶을 살았다. 역설적이게도 씨실과 날실이 만들어 낸 양탄자의 무늬를 보며 고통과 행복, 다시 다난했던 굴곡의 인생이 삶의 무늬를 정교하게 만들어냈음을 깨닫는다. 자연의 일부분으로서 삶의 무의미함 에서 느끼는 자유로움, 유물론에서 건져 올린 그 깨달음이 온전한 해방감을 준다.


인간은 태어나서, 고생하다, 죽는다.(2권, 365쪽) 모든 것이 삶의 무늬를 정교하게 하며, 자신만의 무늬를 짜다가 삶의 마지막, 그 무늬를 남기고 홀연히 떠나는 게 인생이라는 통찰. 행복도 불행도 무의미하다는 다소 냉소적인 시선은 삶에 대한 온기를 품고 있다. 파리에서 방황했던 시간은 필립에게 감성을 선물한다. 나무사이로 비쳐든 햇빛이 만들어내는 무늬와 하늘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 지금, 여기에

실패를 통해서 자신의 한계와 능력을 발견하고, 고통 가득한 서사들이 삶에 대한 성찰을 묵직하게 한다. 미지의 삶에서 겪어낸 감정의 질곡은 필립의 눈을 깊게 해 주지만 또다시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는 행복을 꿈꾼다. 삶 속에서 달의 뒷면을 볼 수 있는 그 통찰은 거저 얻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고통과 실패를 피해야 한다, 행복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니 비로소 능동적 주체로서 살아갈 힘을 얻는다. 무의미함속에서 자유와 행복을 발견하며 온전히 스스로의 선택으로 만들어가는 필립의 인생은 비로소 빛을 더해간다. 관념주의가 도피가 아님을, 자기 통제가 열정적이고 적극적인 자세임 을, 내면의 삶도 다양하고 풍부한 경험을 줄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외롭게 살아온 필립은 애 설리의 가족에게서 따뜻함을 느낀다. 샐리에 대한 차분하고 단단한 사랑은 내면의 결핍을 채운다. 자신을 믿고 지지하는 존재는 삶의 무늬를 만들어갈 힘을 준다. 필립은 마음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미래가 아닌 현재에 집중하며 살고 있는지 돌아본다.


나는 어떤 무늬를 만들어가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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