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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용숙 Aug 14. 2021

여름 왕관

성냥팔이 소녀 재해석 동화 :  여름 왕관

“엄마, 엄마” 혜수는 잠에서 깨었다. 울다 깬 혜수의 베개가 축축하다. 혜수는 외갓집에서 할머니 할아버지와 살고 있다. 엄마는 가끔 외가에 왔다가 아침 햇살이 비치기 전 혜수 볼에 뽀뽀를 하고 서둘러 떠났다. 엄마가 왔다가 간 날이면 혜수는 어김없이 꿈을 꾸었다. 버스를 타고 떠나는 엄마를 붙잡기 위해 달려갔으나 버스를 놓쳐  흐느끼다가 일어나는 것이었다.


매미가 밤낮으로 울어대던 때였다. 엄마가 한참 만에 외갓집에 왔다. 혜수는 하루 종일 엄마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엄마는 혜수 볼을 깨물기도 하고 ‘혜수가 많이 컸구나’ 하면서 번쩍 들어 올리기도 했다. 세상에서 엄마가 제일 좋았다. 점심을 먹고 난 후 잠깐 낮잠 자고 일어났는데 집안이 조용하다. 맑았던 하늘에 검은 구름이 몰려와 있었다. 엄마가 보이지 않는다. “엄마!, 엄마아!”하고 크게 불러보았다. “엄마는 갔다” 할머니께서 안방 문을 열고 말씀하셨다. 혜수는 신발도 신지 않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지금 뛰어가면 엄마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마가 오늘 안 간다고 했는데 그럴 리가 없었다. 갑자기 하늘에서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발바닥이 따끔거리고 종아리에 물이 튀었지만 엄마가 버스를 타기 전에 만나야 했다.  혜수는 비를 맞으며 무작정 뛰다가 물웅덩이에 발이 빠졌다. 그때 오른쪽 발목을 무언가가 톡 쏘는 듯했다. 혜수는 그대로 넘어져 일어나지 못했다.


혜수가 정신을 차린 건 새벽녘이었다. 할아버지는 혜수가 나가고 얼마 안 있어 뒤쫓아  나가셨다. 웅덩이에 쓰러져 있는 혜수를 업 집에 데려왔으나 혜수는 눈을 감은 채 엄마만 찾았다. 빗물에 미끄러지면서 접혔던  발목이 퉁퉁 부었다. 마당에서 벌들이 윙윙대고 참매미가 매움 매움 울어댔지만 혜수는 발목 낳을 때까지 꼼짝없이 누워있어야 했다. 며칠 열이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꽃밭에 있는 보랏빛 달개비 잎에 민달팽이 한 마리가 뿔을 뻗어 이리저리 흔들면서 내려오고 있다.

 “안녕?” 혜수가 반갑게 인사하자 민달팽이는 관심 없다는 듯 그냥 지나쳤다.

“어디 가니?” 재차 묻자

“너 같이 빨리 달리는 애는 몰라도 돼” 민달팽이가 귀찮은 듯 작은 소리로 말다.

"빨리 달리면 얼마나 신나는데..."

"무턱대고 달리다가 다리 다쳤잖아" 민달팽이는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느리게 갈 수 있어! 나도 데려가 줘"

“그럼 한 가지 약속을 해야 해” 민달팽이는 천천히 배를 밀면서 말했다.

“뭔데?”

“절대 나보다 먼저 가면 안돼, 만약 네가 나보다 먼저 한 발을 내딛는 순간 너는 두 발로 걸을 수 없게 될 거야”

혜수는 잠시 머뭇거렸다.

“거봐 자신 없잖아, 그냥 혼자 놀아”

“좋아! 네 뒤에서 걸을게”


혜수는 한 발을 들어서 천천히 내려놓고 다시 한참 기다렸다가 한 발을 떼어 옮겼다. 구름이 마당 가득 머물더니 소나기가 한차례 지나갔다. 혜수는 지루했다. 괜히 약속을 한 것 같았다. 언제쯤 마당을 다 건너갈지 몰랐다. 땀도 나고 다리에 쥐도 났다. 에라 모르겠다, 성큼 왼발을 민달팽이 앞에 놓았다. 그러자 바로 오른발에 무거운 쇳덩이가 매달린 듯 다리를 옮길 수가 없었다. “내 다리! 내 다리!”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민달팽이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제 갈 길을 갔다. 그런데 옆을 보니까 쇠똥구리가 자기 몸의 세 배나 되는 쇠똥을 굴리면서 가고 있었다.

“어디 가니?”

“따라와 봐, 그러나 내 뒤를 따라와야 해. 그렇지 않으면 너의 두 다리는 움직일 수 없어”

쇠똥구리는 머리에 난 더듬이 두 개를 비비며 말했다. 이번엔 혜수도 머리를 썼다. 걷지 말고 쇠똥구리처럼 기어서 가기로 했다. 쇠똥구리가 쇠똥을 한 번 굴릴 때 혜수는 한쪽 무릎을 한 뼘의 반의반의 반의반만큼 나아가게 했다. 꽃밭을 지나 포도넝쿨 아래를 기어서 물이 졸졸 흐르는 개울을 건너 숲으로 들어갔다.


그러는 동안 혜수 뒤에는 많은 친구들이 따라왔다. 풍뎅이‧물방개‧매미‧사슴벌레‧반딧불이‧나비‧잠자리... 맨드라미‧나팔꽃‧채송화‧백일홍... 그리고 예쁜 작은 새들도 뒤쫓아 왔다. 숲 속에는 작은 친구들을 괴롭히는 두더지 방울뱀이 바위 뒤에 숨어서 그들을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한 마음으로 "하나, 둘, 셋" 힘차게 발맞춰 가고 있었기 때문에 감히 덤벼들지 못했다.  몇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이제 다 왔어” 쇠똥구리가 말했다. 어느새 주홍빛 아침햇살이 모두의 얼굴을 비추었다. 땀방울이 햇살에 구슬처럼 빛났다. 넓은 터에는 벌써 도착한 민달팽이가 금빛 왕관을 쓰고 색색의 꽃으로 장식된 의자에 앉아 있었다. 혜수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 생각나 얼굴이 달아올랐다.


민달팽이는 웃으면서 혜수에게 다가왔다.

“오늘은 여름을 마무리하는 축제날이야, 잘 왔어. 우리는 곧 이 세상을 떠날 거야. 이 왕관을 맡아줘”

그리곤 혜수의 머리에 왕관을 씌워주었다. 왕관은 여름에 가장 힘든 일을 참고 견딘 아이에게 주는 것이었다. 왕관을 쓰는 아이는 한 가지 소원을 이룰 수 있었다. 혜수는 왕관을 쓰고 엄마 있는 곳으로 날아갈 생각에 신이 나서 큰 소리로 “야호!”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에 깜짝 놀라 꿈을 깼다. 민달팽이와 쇠똥구리를 생각하며 눈빛이 더욱 맑아진 혜수는 언제까지나 엄마를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여름 왕관이 혜수의 소원을 들어줄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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