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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용숙 Sep 07. 2021

건강한 늪 하나를 갖고 싶다

늪 - 박기옥

건강한 늪 하나를 가지고 싶다

 

늪 – 박기옥


이제 나는 나의 감성의 영토 속에 늪 하나를 가지고 싶다

젊은 날의 온갖 욕망과 집념, 절망과 고통에서 비켜나 

마음의 흐름과 온도를 조절하는 나의 늪을 가지고 싶다.

누구던가 이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는 머리와 가슴에

이르는 길이라 했다. 생각은 언제나 마음을 배신하고,

마음은 항상 생각을 따르지 못하였다. 어리석고 미련하여

늪의 깊이를 부정하고 힘을 거부하지 않았던가,



시(詩)를 쓰지 못해서 시(詩)를 읽는다. 엄청난 사유의 집결지 시(詩)를 읽다보면 시인들에게 저절로 경외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잃었던 감각을 일깨워주고 굳어진 감성을 흔들어주는 수많은 언어와 문장들의 향연, 매번 맛있고 감미롭지만은 않지만 시가 있어서 행복할 때가 많다. 시를 읽을 때마다 자주 유년의 뜰로 여행을 한다. 동시보다 일반 시를 읽을 때 유독 동심의 세계로 빠지는데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분명 시 속의 거대담론 속에는 시인의 동심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확신한다. 인생을 노래하든 사랑의 괴로움을 토하든 그런 시를 읽어도 나는 그냥 동심 속에 빠져든다. 친구가 말했다. 


“넌 말이야 인생의 쓴 맛을 모르는 아직 사춘기 지나지 않은 미숙아야”


그런데 위의 시(詩)를 읽는 순간 번갯불 하나가 눈앞에 지나갔다. ‘감성의 영토에 늪 하나를 갖고 싶다’ 이 한 문장에서 목이 메어왔다. 나에게 진절머리 흔들게 하는 늪을 갖고 싶어하다니 이런 발칙한 시가 어디 있단 말인가. 시가 마냥 동심을 소환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을 각성하게 하는 죽비의 역할도 한다. 결혼 초부터 나란 존재에 대해서 생각해볼 겨를이 없었다. 직장 일과 가사 육아 며느리의 둘레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가장 큰 사치는 월급날 저렴한 가격의 노래 테이프와 시집을 사서 눈앞에 쌓아놓고 ‘언젠가는 들어야지, 읽어야지’ 하는 마음을 내는 게 전부였다.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정직이 삶의 가장 큰 가치라고 주입된 여성과 어떡해서든 성공해서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남자와의 결혼 생활은 그야말로 ‘늪’ 자체였다. 늪의 소용돌이 속에는 사실과 진실 아닌 것, 거짓과 거짓 아닌 불신이 혼재되어 있었다. 나는 늪에 빠진 여자이고 이 늪에서 절대 빠져나올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시인은 ‘늪’ 하나를 갖고 싶다고 했다. 그것도 감성의 영토에 가꾸고 싶단다. 내 발목을 잡고 있는 귀신같은 늪이 아닌 그녀의 늪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궁금했다. <쾌락의 이해> 작품소개에서 그녀가 쓴 것을 읽어봤다. ‘수필이라는 늪 하나를 가슴에 품은지 10여년이 되었다. 글쓰기는 내게 있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작은 늪 하나를 가꾸는 일이다. 중략~ 늪은 더러운 물질을 깨끗하게 걸러주고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는 곳이다. ‘움직임’이다. 중략~ 생명의 부활이다.‘라고 했다. ‘늪’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고귀하게 와 닿기는 처음이었다. 그렇다면 내 마음 속에도 소멸과 생성이 이루어지는 늪 하나를 키운다면 오염된 환경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그녀처럼 글쓰기로서 늪을 가꾸면 삶이 변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일기조차 쓰지 않는 내가 무슨 수로 글을 쓴단 말인가? 또 시에서처럼 생각은 언제나 마음을 배신하고, 마음은 항상 생각을 따르지 못하였다. 늘 핑계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어 자신을 위한 어떤 것도 시도하지 않은 채 세월만 보냈다.


 어제 오랜만에 집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우포늪에 다녀왔다. 그곳은 마음이 울적할 때 자주 찾는 장소이다. 지난 일 년 동안 이곳을 찾지 않았다. 아마 마음 울적함이 덜 했었는지 모른다. 네 개의 늪 중에서 가장 큰 우포늪은 경관이 제일 아름답다. 대대제방쪽과 제1경관 쪽으로 갈라지는 중앙지점의 포플라나무는 얼마나 멋지고 늠름한지. 호수 같은 늪의 물바람에 와르르 소리 내며 흔들어대는 포플러나무 잎들은 일억 사천만년 원시 늪이 우는 소리를 대변해주는 것 같다. 늪의 바닥을 기어다니는 원시생명 벌레들의 움직임도 나뭇잎 흔들림에 묻어날 것이다. 우포의 나뭇잎들은 바람이 안 불어도 소리와 모양이 어떤 진동의 울림으로 파문을 일으킨다. 포플러나무 아래 서 보면 알 수 있다. 늪의 깊이에서 퍼올려지는 뭇 생명들의 움직임이 우포늪의 생태를 어느 누구도 규정할 수 없게 만든다는 걸.

 벌써 가을 기운이 곳곳에 스며들어 주변 나뭇잎들이 노랗게 변해있다. 한 여름 온통 초록으로 늪을 메우던 개구리밥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간간히 비 뿌리는 하늘빛을 닮아 늪의 물빛은 은회색을 띠고 있었다. 옥양목천을 뽀얗게 삶아서 널어놓은 듯 일렁일렁 늪의 표면이 바람에 흔들린다. 사람의 삶이 펼쳐지는 마당 같기도 하다. 이곳은 자연습지라서 물의 순환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곳이다. 일억 사천만 년 전에도 생명이 살았고 그 생명이 진화한 또 다른 생명이 늪 속에 있을 것이다. 원시생명이 살아 숨 쉬는 생명의 늪인 셈이다. 계절마다, 일출이나 일몰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 불거나 햇빛 내려 쪼이거나 가늠이 어려운 시시때때 빛과 색이 다른 곳, 뭇 생명들의 소리와 모양이 이것인가 싶으면 순식간에 변형되어 옛 이야기를 만들어버리는 곳, 이곳이 바로 가슴 속 깊이 감성의 영토에 생명을 불어넣는 늪이라고 하겠다. 


내 마음 속 늪의 형태는 바로 여기 우포늪을 닮으면 좋겠다. 영감을 주고 생명을 살리고 환경을 좋게 만드는 지구의 마지막 보고인 자연생태의 장이면 얼마나 좋을까. 너무 거창한가? 아무래도 어제 이슬비 속에서 늪의 고요한 떨림이 몸속으로 들어와 메말랐던 눈물샘을 뚫어놓은 것 때문인지 모르겠다. 늪이라고 다 오동나무에 걸린 연처럼 자신의 의지를 꼼짝달싹 못하게 하지는 않는다. 우포늪처럼 오랜 시간 풍화와 퇴적작용을 거친 늪은 생물을 품어주고 정화하고 생성해주는 생명의 원천으로 존재한다. 그 늪의 언저리에서 나는 늪을 닮고 싶다. 내 마음 속 감성의 영토에 생성하는 늪이 되고싶다.


  메리 올리버는 ‘완벽한 날들’ 책 서문에서 “너는 여기 이렇게 살아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나에게 묻는다면 ‘지금 여기서 나는 내 마음의 흐름과 온도를 조절할 수 있는 건강한 늪 하나를 가지고 싶다.’ 라고 말하겠다. 하루 스물네 시간 내가 선택해서 행복해질 수 있는 마음의 건강한 늪을 만들고 싶다. 시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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