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이한 게 엊그제 같은데 입춘이 지났다. 계절의 첫 절기 봄이 시작된 것이다. 남쪽에는 청매화가 피었고, 항아리에 꽂아 놓은 홍매화 가지에도 꽃봉오리가 맺혔다. 꽃소식이 봄을 질러 먼저 왔으니 겨울이 가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다. 아쉬움이 남아서일까 몸을 움츠러들게 하는 맹추위라도 찾아들면 오히려 마음이 놓인다. 야속하게도 시간은 왜 그리 빠르게 흐르는지. 두꺼운 털 같은 추위가 요 며칠 극성을 부린다. 나도 모르게 어깨를 둥글게 말아 웅크려서 종종걸음 걷는다. 추위가 조금은 따뜻해진다.
예전 겨울은 참 많이도 추웠다. 속눈썹에 입김이 서리면 금세 하얀 성에가 만들어지고, 눈을 깜빡일 때면 속눈썹끼리 둘러붙어 잘 떨어지지도 않았다. 걷는 게 일상이었던 그때는 양말을 두 개 씩 신어도 발이 무척 시렸다. 동상 걸리는 것도 다반사였다. 뺨은 얼어서 실내에 들어가면 발갛게 달아올라 화끈거리기 일쑤였다. 옷은 또 얼마나 껴입었었는지. 추위를 막을 수 있는 옷을 최대한 껴입고 바깥에 나가면 옷의 무게만큼 추위란 놈도 무겁게 느껴졌었다. 요즘에는 추워서 얼어 죽었다는 기사보다 사회에서 소외되어 겪는 고통문제가 더 큰 이슈로 대두되고 있다.
시를 읽다보면 시인의 모습이 그려진다. 추측에 불과하지만 시인은 겨울한파에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의 서러움과 삶에 대한 두려움, 막막함, 끝날 것 같지 않은 추위에 비견되는 불행의 굴레를 보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추위란 놈한테 굴복하지 않는다. 환경이 아무리 목숨을 위협한다 해도 정신세계마저 지배할 수 없다는 프랭클린철학이 시 속에 깔려있다. 추위는 텅빈 위장에 밥 대신 들어앉아 주인행세까지 하며 뛰어논다. 이대로 가다가는 몸의 주인은 추위가 되겠다(기생충처럼). 짧은 시간에 동사 하는 건 시간 문제다. 하지만 추의 속에서 뱃가죽과 등뼈가 얼어붙어 쓰러진다해도 살아날 방법은 있다. 그건 바로 정신통일하여 밥 생각을 하는 것이다. 바압! 얼마나 포근한 말인지.
바깥에서 놀다가 허기져 집에 돌아가면, 이불 밑에 따뜻하게 데워져있던 밥공기들, 언 손으로 밥그릇 움켜쥐고 얼굴에 대면 온 몸으로 퍼져나가던 밥 냄새, 둥근 밥상에 시래기국과 한쌍 되어 올라있던 새카만 보리밥! 식구들 모여앉아 왁자지껄 달그락거리며 배고픈 배 속으로 뜨거운 밥 집어넣었던 겨울 저녁...그곳엔 엄마와 아버지와 형제와 친척들 이웃들, 우리가 돌보던 짐승들 채소들 꽃들의 온기가 담겨 있었다.
밥! 어머니 사랑의 총체, 이거 하나면 열 번 스무 번의 좌절도 이겨낼 수 있었다. 아무리 추위가 위협을 가해도 오뚝이처럼 설 수 있게 하는 묘약이다. 그래서 어린 날에는 엄마의 정성이 깃든 먹거리가 영혼을 살찌게 한다고 한다. 겨울추위가 아직 가셔지지 않았다. 왜소한 나뭇가지들이 한쪽으로 쏠릴 만큼 바람도 세차다. 웅크러진 어깨를 억지로라도 펴본다. 굶주린 배 속에 정신통일하여 알게 모르게 받아온 사랑을 퍼 올린다. 살아야 할 이유가 수천수만 가지다. 따뜻한 밥 생각 하나에 무너져버린 추위, 사랑에 굶주린 개구장이 꼬마유령 캐스퍼같다. 겨울을 겨울답게 하는 겨울본질, 멀뚱멀뚱 쳐다보며 공격의 본분을 잊어버린 추위가 그래서 더 애틋하다.